[사설] 부산 가계·자영업·중기 연체율 심각, 경제 활력 높여야
고금리 장기화와 지역 경기 위축이 초래한 ‘돈 가뭄’의 여파가 민생은 물론 기업 활동 전반을 옥죄고 있다. 코로나19 시절 경기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저금리 대출을 받았던 개인, 자영업자, 중소기업은 지난해부터 금리 상승 악재를 만나 빚을 갚기 위해 신규 대출을 받아야 하는 악순환에 갇혔다. 문제는 이마저도 어려워 연체의 수렁에 빠지는 한계 대출자가 급증한 점이다. 부산에서는 이달 들어서만 벌써 세 곳의 향토 건설사가 부도 처리됐다. 현장은 “코로나 때만큼 심각하다”는 비명으로 아우성이다. 자칫 부실 도미노로 이어지지 않도록 자금의 숨통을 틔우는 동시에 경제 활력을 높이는 근본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부산은행이 집계한 1분기 연체율(1개월 이상 미납)을 들여다 보면 대출 부실화의 조짐은 전방위적이다. 지금 대처하지 않으면 언제 시한폭탄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강력한 경고로 읽힌다. 가계 연체율은 0.49%로 2020년 이후 최고치다. 이는 5대 시중은행의 평균 가계 연체율 0.28%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지역 경제의 추락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가계의 신용 리스크가 올라가자 금융권에서는 2003년 ‘카드 대란’의 악몽을 떠올리는 분위기다. 또 고금리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 아파트를 경매로 내몰고 있다. 올 1분기 부산 경매 건수는 4207건으로 2022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아파트만 보면 3배나 폭증했다. 중소기업 연체율은 0.76%로 코로나19 직격탄을 받았던 2020년 1, 2분기의 0.83%, 0.87% 수준에 근접했다. 연체액도 3765억 원으로 2020년 이후 최대 규모다. 부산은행의 연체율이 높은 건 지역 중기에 대한 대출 비중이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지역 중기는 전통 제조업 중심이라 반도체·IT 중심의 경기 회복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사이 부동산 PF 부실과 자산 매각 애로 등이 겹쳐 자금난에 봉착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나이스(NICE)평가정보가 3월 기준으로 취합한 자영업자 가계·사업자 대출은 1112조 7400억 원으로 코로나19 직전에 비해 51% 증가했다. 부실 채권의 먹구름이 모든 경제 영역을 뒤덮으려는 모양새다. 문제는 연체율 상승이 지속될 거라는 점이다. 미국 기준금리와 환율이 요동치면 국내 시장 금리는 언제든 더 오를 수도 있다. 연체율 급등은 경제의 실핏줄인 가계·자영업자·중소기업이 위기 상황이라는 신호다. 부실이 한꺼번에 터지면 신용 불량자 양산, 연쇄 부도 사태를 맞는다. 사회적 혼란과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는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로 흑자 도산을 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와 금융 당국은 실질적인 대책을 조속히 내놓아야 한다. 특히 지역 경제가 더 큰 위기 상황에 처한 점을 감안할 때 부산시도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마땅한 방법이 없다”며 뒷짐만 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사설] 유튜버 살인극… 조회수 노린 폭력·폭언 판치는 유튜브
지난 9일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벌어진 50대 유튜버 간 대낮 살인 행위는 폭력·폭언 등 막장으로 치닫는 유튜브 문화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각각 수천 명대의 구독자를 거느린 두 사람이 그동안 유튜브로 무차별 비방전을 일삼다 대낮 법원 앞에서 상봉해 칼부림 끝에 한 사람은 살해되고, 또 이를 촬영해 고스란히 생중계하는 일은 분명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시민들은 물론 온 국민들도 법원 앞에서 벌어진 참변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조회수와 수익에만 매몰돼 이성을 내팽개친 유튜버의 도를 넘는 행위가 어디까지 갈지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튜브를 통한 불량 콘텐츠 양산이 문제가 된 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최소한의 금도마저 무시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요즘엔 온라인상에서 다투던 당사자들이 아예 실제로 만나서 싸우는 소위 ‘현피’는 물론 대놓고 하는 인격공격성 방송, 폭행·폭언이 난무하는 영상 등 갈수록 그 내용이 노골적이고 추잡해지고 있다. 부산지법 앞 살인 사건도 유튜브를 통해 상호 비방전을 이어오던 양 당사자가 수십 건의 소송 끝에 적개심을 억누르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유사한 사례는 이외에도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시청자들도 적나라한 영상에 댓글을 달며 이를 후원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처럼 갈수록 자극적인 유튜브 영상이 판치게 된 데는 조회수 증가와 이를 통한 수익 확보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 영상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조회수나 구독자 수만 많으면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가 이 바닥의 생리다. 수익에 도움만 된다면 선정적인 영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가짜뉴스 양산부터 폭력이나 살인 등 반사회적인 내용도 꺼리지 않는다. 실제로 올 3월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한국축구대표팀의 내부 불화 논란이 불거졌을 때 이와 관련한 가짜뉴스를 유포한 제작자들이 단 2주 만에 7억 원의 유튜브 광고 수익을 올렸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니 살인 참극까지도 유튜브 소재로 동원된다. 상황이 이 지경이라면 당국은 조회수만을 노린 유튜브에 대해 규제나 감독 강화 조치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욕설과 폭력, 범죄가 난무하는 지금의 막장 유튜브의 폐해는 너무나 심각하다. 몇 사람의 자유를 위해 어린이와 청소년을 비롯해 온 국민이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다.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에서는 이미 제한적으로 내용 규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표현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플랫폼 사업자 등 서비스 제공자의 책임강화 방안이 필요하다. 유튜버의 활동을 위축 또는 제한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막장 유튜브가 횡행하는 현실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설] 대통령 고개 숙였으나 국민 기대 못 미친 기자회견
윤석열 대통령은 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을 열어 향후 국정 운영 방향과 민감한 문제를 포함한 각종 국정 현안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이번 기자회견은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한 이후에 열려 주목을 받았다. 윤 대통령은 대국민 메시지에서 “저와 정부부터 바꾸겠다” “어떤 질책과 꾸짖음도 겸허한 마음으로 더 깊이 새겨듣겠다” “부족했다”는 표현으로 몸을 한껏 낮췄다. 또한, 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과 관련해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 끼친 부분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지난 KBS 대담에서 국민을 실망시킨 “아쉽다”는 답변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으로 여겨진다. 어떤 정치인과도 선을 긋지 않고 만나고 협치하겠다고 밝힌 점도 의미가 있다. 정치권과 국민 사이에서는 이번 기자회견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다. 국민의힘은 전반적으로 솔직하고 진솔한 회견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당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유승민 전 의원은 “진심으로 반성·성찰하고, 남은 3년의 임기를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없었다”라고 혹평했다. 게다가 윤 대통령이 채상병 순직 사건과 김건희 여사 특검에 대해서 “정치 공세”라면서 반대 및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것은 상당한 정치적 파장이 우려된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국정 기조 쇄신을 바랐던 국민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다”라면서 특검 강행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향후 국정 운영 방향을 밝히고, 기자들의 질문을 들은 점은 긍정적이다. 인구 감소로 지방소멸에 이어 국가소멸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저출생대응기획부’를 부총리 산하로 신설하는 등 해법을 제시한 것은 시의적절한 조치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21대 국회 회기 내에 산업은행 완전 이전 법 통과를 갈망하는 부산으로서는 “공공기관 이전이 각 지역의 경제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지역 산업 특성에 맞춰서 빠른 시일 내에 추진할 것”이라는 윤 대통령의 이번 기자회견 약속이 조속히 실행되기를 촉구한다. 대통령은 이날 ‘야당과 협치’ ‘국회 협조’를 여러 차례 밝혔다. 지난 2년간 ‘산업은행 부산 이전’ ‘부산글로벌허브도시’ 등 대통령의 약속 어느 것 하나도 야당의 협조 없이는 빈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가 절감했다. 협치를 위해서는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자세가 선결되어야 한다. ‘마이웨이’와 ‘불통’으로 일관해 야당과 협조에 실패한다면, 식물정부로 전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은 민생을 위해 애쓰는 대통령, 국민의 질문을 경청하는 대통령, 야당과 협치해 약속을 실천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을 뿐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이번 기자회견을 계기로 향후 3년간 민생 안정과 경제 회복, 국민 소통에 만전을 기하기를 바란다.
[밀물썰물] 대통령의 격노
격노(激怒). 격렬하게 분노하다, 그러니까 몹시 화를 낸다는 뜻. 단어 자체에 벌써 거칠고 급박한 기세가 역력하다. 지난 2년 동안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된 보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언론 보도를 통해 접했을 뿐, 실제로 대통령이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대통령의 언행을 묘사하는 이 말이 뉴스에 끊임없이 나온다는 게 문제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자신의 사적 감정을 주변에 표나게 드러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격노 사례는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만 살펴봐도 부지기수다. 윤 대통령은 이미 검찰에 있을 때부터 격노가 잦았다고 한다. 2020년 4월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은 ‘검언유착’ 사건과 관련해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감찰을 개시하겠다는 보고를 받고는 격노했다. 이 장면은 한동수 전 대검찰청 감찰부장의 저서에 자세히 서술돼 있다. 지난해 3월에는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 맞춰 블랙핑크 공연이 추진되다 무산된 적이 있는데, 이때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실제로 국가안보실장의 교체로 이어졌다. 지난해 연말에도 격노설이 불거졌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 체제로 가기 직전에 당시 김기현 당 대표가 사퇴를 거부하자 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것이다.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선 이후에는 김건희 여사 특검 문제가 거슬렸던 듯하다. 총선 이후 특검을 받는 조건부 방안에 대한 검토가 거론되자 이에 대해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그리고 해병대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 사건. 당시 박정훈 대령이 해당 사단장을 수사 대상으로 올렸고, 대통령이 이러면 누가 사단장을 하느냐면서 ‘VIP가 격노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이 VIP 격노설은 지금 특검 정국의 향방을 가늠할 열쇠를 쥔 사안이다. 일각에 의하면, 지난 9일 기자회견 뒤에도 대통령이 격노하는 등 대통령실에 소란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적 감정의 표출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왕조 시대에나 통하는 스타일이다. 특히 공적 영역에서 사적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리더십은 21세기 민주공화국에서 용납되기 힘들다. 물론 격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분명하게 내야 한다. 관건은 분노의 방향이다. 분노해야 하는 일에 분노하지 않고 분노할 이유가 없는 일에 분노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요 국민들에겐 최악의 모욕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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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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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김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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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부산 국회의원들은 어디에 있나
지난해 2030세계박람회 부산 유치가 좌절된 이후 부산의 3대 현안을 꼽자면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통과,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 에어부산 분리매각이다.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부산의 가장 큰 현안으로 떠오른 건 단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제정이다. 파격적인 규제 혁신 등으로 부산을 싱가포르나 홍콩과 같은 국제도시로 조성하겠다는 구상은 대통령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지고 있다. ‘금융중심지 부산’ 활성화를 위해 산은 본사가 이전해야한다는 당위성 아래 이뤄진 산은법 개정안도 여권의 지지 속에 발의됐지만 여전히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부산의 3대 현안 가운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과 산은법 개정안은 이미 법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야권의 반대로 보름 정도 남은 제21대 국회에서 통과되기는 난망해 보인다. 제22대 국회에서 여야의 협치가 필수불가결의 요소다. 하지만 에어부산 분리매각 문제는 상황이 다르다. 법 제정이나 개정 등이 필요 없다. 당리당략에 따른 여야의 협의 과정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대통령실이나 정부의 결정만으로도 에어부산 분리매각 문제는 해결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에어부산 분리매각은 몇년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오히려 시간이 지연되면서 에어부산의 경쟁력은 저하되고 분리매각의 가능성은 떨어지고 있다. 에어부산 분리매각은 5년 전인 2019년 1월 부산 상공계가 아시아나항공 매각 과정서 필요성을 첫 제기했다. 2020년 9월 산은이 아시아나항공 자회사 분리매각을 언급하면서 분위기는 고조됐다. 같은 해 10월 국토교통부가 지방공항을 기반으로 하는 통합 LCC(저비용 항공사) 운영 방침을 언급하기도 했다. 2022년 7월 공정위원회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조건부 승인하면서 에어부산 분리매각에 불을 지폈다. 지난해 11월 부산시, 상공계, 시민사회단체 등은 분리매각TF, 인수추진TF 등 에어부산 분리매각 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분리매각 운동을 본격화했다. 지난해 12월 에어부산 분리매각 요구 건의문을 첫 채택하고, 지난 2월부터 현재까지 분리매각을 촉구하는 잇단 기자회견이 이뤄졌다. 지역 상공계와 시민사회의 열망은 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상대적으로 시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에어부산 지역 대표 주주로 분리매각의 구심적 역할을 해야 할 시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부산일보〉의 보도 뒤에 박형준 부산시장은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 시는 지난 2일 박 시장 주재로 시의회, 부산상의, 시민단체 등 각계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시정 현안 소통 간담회’를 갖고 에어부산 분리매각 활동을 강화하기로 결의했다. 시의 대응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상공계와 시민사회의 열망을 받아들여 TF팀을 확대하고, 전방위적인 노력을 펼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지역 정치권이다. 그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이나 산은법의 통과에는 중앙당 핑계만 대면서 지역 최대 현안을 외면해왔던 지역 정치권은 에어부산 분리매각 문제에는 아예 손을 놓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민의힘 부산시당이 시, 부산상의, 시의회 등과 에어부산 분리매각 현안 간담회를 개최한 뒤 후속 조치는 없었다. 지난달 말 국민의힘 22대 부산 당선인들이 당선 후 첫 모임을 갖고 부산지역 발전과 현안 사업 추진에 다같이 힘을 모으기로 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에어부산 분리매각에 대한 발언은 없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에어부산 분리매각 문제는 대통령실이나 정부의 결정만으로도 해결이 가능하다. 주요 당사자인 국토교통부, 아시아나항공의 주채권단인 산업은행, 그리고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합병한 대한항공 등을 대상으로 설득 작업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오히려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이나 산은법보다 더 빨리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명분도 충분하다. 국토균형발전 차원에서 가덕신공항을 인천국제공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관문공항으로 성장시킨다는 윤 대통령의 공약이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지역 거점 항공사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또 국토부와 산은도 지방공항을 기반으로 하는 통합 LCC 운영 방침과 에어부산 분리매각을 각각 언급한 바가 있어 이를 뒤집는 것에 대해 공세를 가하면 된다. 지역 정치권은 각성할 필요가 있다. 중앙당, 대통령실의 눈치를 볼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설득하면서 지역 현안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국토부와 산은, 대한항공 등에도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야 한다. 지역 정치권이 어떻게 행동할지 부산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최세헌 경제부장 cornie@busan.com
[오션 뷰] 해사법원 설치 앞당길 방법
수출입 화물을 싣고 나르던 선박이 충돌 사고가 발생하면 화물이 손상된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한다. 때론 분쟁도 생긴다. 분쟁을 풀어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재를 통한 해결이다. 당사자가 중재인에게 사건 해결을 의뢰해 그 판정에 따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 사법기관인 법원의 재판을 통한 해결이다. 그런데 판결을 내려주는 재판부가 특별하게 사건을 취급할 때도 있다. 그래서 법원은 행정법원, 가정법원, 도산법원과 같은 전문법원을 만들어 재판부의 전문성을 보강해 운영한다. 해사법원 설치 운동은 해사 사건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전문법원을 만들자는 것이다. 대법원은 ‘해사 사건은 특별히 다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왔다. 전담재판부를 설치한 것이 좋은 예이다. 1990년대부터 국제 거래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 국제 거래 사건은 국제물품 매매에서 발생한 사건을 담당했다. 국제 거래에 해사 사건을 포함해 왔다. 선박 충돌이나 오염 사고는 국제 거래가 아니라 고유한 해사법의 문제다. 그래서 해상 변호사와 해상법 교수들이 국제 거래와 해사는 다르기에 분리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2016년 해사 사건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과 부산지방법원에 해사, 국제 거래, 중재를 함께 처리하는 전담재판부가 설치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전담재판부가 설치된 지 몇 년이 지나도 해사 사건이 다른 재판부에 배당되곤 했다. 이에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해사 사건에 대해 별도의 사건명을 받는 운동을 펼쳤다. 2021년부터 받은 손해배상 ‘해’라는 사건명이 그것이다. 사무국에서 배당할 때 해사 사건 전담재판부에 이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이런 사건명 기재 제도를 통해 해사 사건은 전담부에 더 집중되게 된다. 이와 같이 대법원과 학계와 전문가들은 꾸준하게 해사 사건을 전문 판사들이 별도로 처리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왔다. 한편으로는 부산, 인천, 서울에서도 해사법원 설치 운동이 1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20대에 이어서 21대 국회에서도 해사법원 설치 법안은 법사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22대 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독립된 전문법원을 만들 만큼 사건 수가 많지 않고 수요자들의 요구가 그렇게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사 사건 분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용선계약 분쟁은 계약서에 중재로 처리하기로 약정이 되어 있다. 외국 당사자가 끼게 되면 영국이나 싱가포르의 해사 중재로 간다고 정한다. 대형 선박회사의 경우 법무보험 담당이 20명이 넘지만, 이 가운데 90%는 영국과 싱가포르와 일을 한다. 한진해운이 파산하면서 사건 수는 더 줄었다. 외국에서 처리되는 것에 익숙해진 수요자들이 국내 해사법원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다. 해사법원의 설치를 위해서는 수요자들이 그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담재판부를 강화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본다. 영국과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은 독자적인 재판 규칙을 가지고 해사 사건을 특별하게 처리한다. 이를 우리나라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현재의 해사 사건 전담재판부 기능을 강화하는 특별한 해사 사건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이 규칙에 우리가 원하는 내용을 담자. 우선 해사 사건 전담부 판사는 해사법에 정통하고 경험 있는 전문법관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선박 가압류의 경우 휴일엔 가압류가 되어도 쉽게 압류에서 풀려나도록 해야 한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이런 제도를 두고 있다. 영어로도 재판할 수 있어야 한다. 외국인이 일방 당사자가 되는 사건도 많기 때문이다. 각 법원에 신청되는 해사 사건은 모두 해사 사건 전담재판부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이런 규칙의 내용이 만들어지고 실행된다면, 수요자의 신뢰를 더 얻게 될 것이다. 외국으로 가는 사건이나 중재 사건을 우리 법원으로 가져오면서 사건 수를 늘려야 한다. 우리 법원이 비교 우위에 있다는 점을 우리나라 수요자는 물론이고, 외국 수요자들에게도 꾸준히 알려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건이 더 많아지면 전담재판부가 자연스럽게 명실상부한 독립된 해사 전문법원으로 승격될 것이다. 2018년에 설치된 도산 전문법원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해사 전담재판부와 국제 거래 재판 전담부 담당 사건을 하나로 묶어 해사법원 관할로 하자는 안도 탁견이다. 22대 국회에서는 해사법원의 설치 운동을 펼치면서도 현재 설치돼 운영하는 해사 전담재판부를 더 강화해 사건 수요를 늘리고 수요자들의 신뢰를 확보하자. 이렇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해사법원 설치를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기고] 평화의 소녀상 훼손, 반드시 처벌돼야 한다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 역사가 지키지 못한 우리의 딸이자, 할머니를 표상한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평화의 소녀상 발뒤꿈치를 보시라. 불편하게도 들려 있다. 이는 조국 땅에서조차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역사의 아픔을 상징한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채 움켜쥔 두 주먹에는 반드시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다. 그런 평화의 소녀상이 또다시 수난을 겪고 있다.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은 지난달 6일 검은 비닐봉지가 씌워지고 그 위에 테이프로 부착된 흰 마스크에 ‘철거’라는 문구가 쓰인 채 발견됐다. 해당 장면은 일간베스트(일베) 사이트에 올랐고 조롱하는 댓글이 달렸다. 이어 27일에는 일본 맥주와 초밥을 소녀상에게 먹이고, 맥주 캔을 소녀상 머리 위에 올려 놓은 모습까지 촬영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20만 명이 넘는 조선의 처녀가 전쟁터에 끌려가 성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그 전쟁 범죄의 피해자들이 왜 지금 이런 모욕과 혐오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소녀상은 2016년 기초지자체의 강제 철거 등 마찰을 빚다 가까스로 지금 자리에 건립이 된 뒤에도 쓰레기 투척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에 부산 시민사회가 힘을 모은 결과 소녀상을 보호·관리하는 부산시 조례가 만들어졌고, 지금의 자리에서 잘 보존되어 왔다. 한데, 최근 친일 극우 세력의 노골적인 혐오 공격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소녀상에 검은 비닐봉지와 마스크를 씌운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목적지도 모른 채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소녀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인권의 가치를 생각할 때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범죄적인 일이다. ‘소녀상을 지키는 부산시민행동’은 즉시 재물손괴죄와 모욕죄로 경찰에 고발했다. 소녀상을 제작한 작가도 “‘혐오 마스크’ 챌린지에 충격을 받았다”며 저작권 침해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에 인정이나 사죄를 요구하지 않은 채 과거사를 덮고 미래로 가자는 외교 방향을 제시한 뒤 친일 극우 세력의 공세가 노골화된 측면이 있다. 부산의 소녀상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역의 소녀상도 유사한 핍박을 받고 있다.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은 전국의 소녀상을 찾아다니며 ‘일본군 위안부는 가짜’라는 주장을 하면서 소녀상 철거까지 요구하고 있다. 일본 극우와 누가 더 극단인지를 다투는 모양새라 어처구니가 없다. 최근에 기승을 부리는 소녀상 훼손 행위는 부산 시민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주고 있다. 부산시 조례는 부산시와 동구청, 시민사회가 함께 부산 동구 평화의 소녀상을 보호·관리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특히 이 조례는 부산시장이 기념 조형물을 보호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산시는 소녀상을 보호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나아가 부산시민이 세운 소녀상을 훼손하는 행위가 엄벌에 처해질 수 있도록 행정적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함께하기 위해 부산 시민이 힘과 뜻을 모아 세운 소녀상이 더 이상 유린당해서는 안 된다. 고인이 된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부산 시민사회는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에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강병균 칼럼] 대통령의 소통, 진정성 필요하다
10일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윤 대통령은 이에 맞춰 하루 전날 기자회견을 갖고 국정 운영과 각종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2022년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이어 1년 9개월 만에 두 번째 열린 공식 기자회견이었다. 이번 회견은 윤 대통령이 취임 초기 출근길에 행한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을 중단한 지 500여 일 만에 마련한 실질적인 첫 대국민 접촉이다. 그동안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실패 관련 발언,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 담화, 신년 대담 등 형식으로 대통령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밝히기는 했다. 그런데 질의응답이 오가는 공개 기자회견은 오랜만이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없앤 민정수석실을 새로 설치하기로 했다. 이날 즉시 김주현 전 법무부 차관을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다. 대통령실에서 매우 약해진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민정수석실 복원 이유다. 지난달 29일에는 윤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간 회담이 열렸다. 이는 윤석열 정부 들어 처음 성사된 영수회담으로, 실종된 여야 협치의 가능성이 엿보인 데 의의가 있다. 여야 영수회담, 민정수석실 부활, 대국민 기자회견. 연이어 벌어진 일들은 의미와 파급력이 작지 않다. 이 사안들만 놓고 단편적으로 봤을 때는 윤 대통령이 소통을 중시하고, 이를 위한 실천에 노력하는 걸로 착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세 가지는 자발적이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는 게 엄연한 진리다. 애초부터 선제적이고 능동적인 계획에 의해 추진된 것이 아니어서 그 의미를 반감한다. 대통령이 정치적 어려움에 처한 나머지 위기를 모면하거나 돌파구를 찾으려는 궁여지책에서 비롯됐다. 이런 사실은 윤 대통령이 평소 영수회담을 원치 않은 데서 먼저 확인된다.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거야의 협조가 필요한데도 민주당 이 대표의 수차례에 걸친 회담 제의를 무시했다. 각종 형사사건 피의자인 이 대표를 대통령과 동급으로 예우하고 강력한 대선주자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싫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중론이다. 민정수석실도 마찬가지다. 대선후보 시절 사정기관 장악 등에 악용된 민정수석실 폐지를 자주 강조하며 공약으로까지 내걸었던 윤 대통령이다. 그러다가 야당의 우려에 아랑곳없이 민심 파악을 내세워 부활시킨 것이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이 2022년 11월 이후 소통 부재라는 여론의 지적 속에서도 더는 이행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9일 기자들과 문답을 주고받은 쌍방향 기자회견도 안 내켰을 테다. 대통령실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취임 2주년 기자회견 진행 여부를 두고 전망이 갈렸을 정도다. 꿈쩍하지 않던 윤 대통령이 소통에 관심을 보이며 국민 및 야당과 대화에 나서도록 만든 건 제22대 총선 결과다. 대통령의 태도 변화는 민주당이 최종적으로 무려 171석을 차지하고 국민의힘은 108석 확보에 그친 집권 여당의 참패에 기인한다. 더욱이 선거 참패가 윤 대통령의 오만하고 독단적인 불통식 국정운영 탓이란 지적이 여당 안팎에서 잇따르는 실정이다. 총선 직후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8.0%가 윤 대통령을 총선 참패 책임자로 꼽았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목한 이는 10.0%에 불과했다. 심지어 여당 지지층은 윤 70.4%, 한 11.3%로 대통령의 책임을 더 무겁게 여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20%대 중반~30%대 초반의 바닥 수준을 보일 수밖에 없다. 최근 윤 대통령의 잇단 조치는 총선 패배로 수세에 몰려 낮은 지지율을 의식한 산물이긴 하지만, 아집과 독선이 강했던 이전과 다른 모습인 건 분명하다. 윤 대통령은 상반된 여야 평가가 나온 9일 기자회견에서도 “여야 정당과 소통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많이 늦은 감이 있으나 남은 임기 3년을 위해 고무적인 자세다. 윤 대통령의 취임 일성은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긴 가장 중요한 이유로 국민과의 소통을 든 바 있어서다. 더 이상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 나가며 국민 신뢰를 높여야 할 때다. 그러려면 진정성이 관건이다. 대통령 자신이 소통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소통 방법에 변화를 보이지 않을 경우 진정한 소통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먼저 국민 곁으로 바싹 다가서고, 특히 고물가·고금리에 힘겨운 서민과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앞으로 3년간 주력해야 할 민생 안정 등 원활한 국정수행에 절실한 여야정 대화와 협치를 잘 이끌어 내도록 열린 마음과 겸허한 자세도 요구된다. 국민 행복을 위해 환골탈태한 소통을 바란다. 진보·보수층 다수가 지지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까닭이다.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
[오금아의 그림책방] 우리, 가족입니다
5월에는 기념일이 참 많습니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세계인의 날, 성년의 날 등 가정과 공동체를 생각하는 기념일이 이어집니다. 그림책으로 사회 속 가족의 의미를 읽어봤습니다. <우리 가족입니다>(보림출판사)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이혜란 작가는 부산에서 중국집을 운영한 부모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엄마·아빠·나·동생’ 단란하게 살던 주인공 가족에게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찾아옵니다. 아빠는 어린 시절 할머니(엄마)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쓰레기를 주워 오고, 대소변을 못 가리고, 길에서 잠을 잡니다. 투덜대는 주인공에게 아빠는 “그래도 엄마니까”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아빠와 아빠의 상처를 이해하는 엄마를 지켜보며 주인공은 미움·아픔까지 품는 것이 가족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북멘토)는 가수 하림이 글을 쓰고 지경애 작가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사일’이라는 노래 가사에는 식당 사장, 공사장 노동자, 요구르트 판매원, 콜센터 직원, 택배기사, 고층 건물 청소부, 노점상 할머니, 간호사, 소방관 등 사회 곳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두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적절한 휴식을 가지는 세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바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어깨에 눈길을 준 그림책도 있습니다. 이지미 작가의 <모두의 어깨>(모든요일그림책/알에이치코리아)는 한 어린이의 등굣길을 따라 걸으며 사람들의 일상을 봅니다. 삶을 짊어진 어깨 위에 피로가 쌓일 땐 잠시 쉬어도 좋다고, 즐거울 땐 신나게 들썩여도 좋다고, 실패로 축 처질 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깨를 빌려줄 누군가가 네 곁에 있다’는 글이 위로로 다가옵니다. 다양한 세대·직업·모습의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불꽃놀이를 감상하는 마지막 장면이 좋습니다(그림).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가정의 달에 나만이 아니라 타인의 가족까지 존중하는 세상을 생각해 봅니다.
[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부산, 청년의 꿈 키우는 도시로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충이 되어 있더라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 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레고르 잠자처럼 벌레가 된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이 바뀐 느낌이었다. 지난 3일 부산공업고등학교(이하 부산공고) 개교 100주년 행사를 마치고 난 다음 날이었다. 하루 종일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산공고 창립 100주년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방송과 언론에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전교생 장학금 100만 원’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주위 반응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며 부산공고 출신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갑자기 기울어진 가정 형편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건축과가 있는 학교를 선택해 부산공고에 진학했지만, 늘 가슴 한구석에는 왠지 달리기도 전에 출발선에서 뒤처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고 싶었던 건축 공부를 하며 도면을 그리고 건축 재료 실습과 목공 실습을 하면서도 늘 미래가 불안했다. 학력·학벌 우선시 하는 세태 지역 불균형·인재 유출 초래 기술·열정이 평가 기준 돼야 고교 시절 배웠던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구조 원리나 실습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면서 유용했다. 실습 시간에 익힌 경험은 대학에서 처음 건축을 접한 동기들보다 훨씬 폭넓은 지식으로 연결됐다. 건축사 시험은 단번에 합격했고 지역의 건축사사무소에 취업해 어느덧 대표가 되었다. 그래도 늘 공고 출신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 부산공고는 최상위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음에도 그랬다. 2% 부족한 느낌, 결핍된 뭔가가 필자를 규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른다. 필자 혼자만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대학교수가 되어도, 굴지의 회사 대표가 되어도, 정치인이 되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공고 출신이라는 사실이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있어서 공고의 역할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서사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경제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공업 또는 기술과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과 노력으로 일궈낸 그들의 기술력은 존중받기보다는 학력과 학벌 차별에 밀려 편견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대학 진학과 명문대 입학에 지나친 가치를 두어왔다. 이미 한국사회는, 라캉의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은 지 오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매기고 적성과 무관한 진로를 선택하도록 압박받는 현실은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인재 유출의 악순환을 낳고 있다. 부산공고 개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위의 지점이었다. 지금이라고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 오히려 과거의 명문고라는 인식보다는 시대가 변하면서 더 많은 이유로 움츠러든 후배들의 미래를 응원하고 부산공고 출신임이 자랑스러웠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후배들이 4만 동문을 믿고 기죽지 말고 당당히 학교를 다녔으면 한다는 의미로 전교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정한식(51회) 선배의 말은 모든 동문들의 마음이었다. 이런 사실을 각 방송과 언론에서 크게 다뤄주어 뜻하지 않게 많은 축하와 격려를 받게 됐다. 부산공고 개교 100주년 기념, 전교생 장학금 100만 원은 후배들에게 보내는 선배들의 애정 어린 박수갈채이자 내일의 희망을 향한 따뜻한 바람이었다. 며칠 전, 부산의 미래를 이끌 청년을 지원하기 위한 청년 플랫폼 (사)청년문화진흥협회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기간 청년 지원 활동을 펼쳐온 부산 대표 기업과 기관, 대학, 언론이 참여해 새로운 청년문화를 싹 틔우고 청년 네트워크를 촘촘히 엮어 청년들이 몰려드는 부산을 만들어 보자는 의기가 모아진 것이라 한다. 부산에 청년 유입보다 더 중요한 건 부산에서 자란 청년이 성장해 부산의 발전에 힘을 보태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학력과 학벌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직업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모든 청년들이 자신의 기술과 열정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한 개인의 내재된 가능성을 북돋아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여는 원동력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부산은 학력과 학벌과 무관하게 청년이 꿈꿀 수 있는 도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도시의 미래는 그 품에서 자란 인재들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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