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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인생 이모작, 퇴직 전 미리 설계하자
매년 봄 공기업 등에서 퇴직하는 사람이 많다. 제2의 삶에 대한 준비 없이 맞이한 퇴직은 막막하기 마련이다. 노년층 일자리가 태부족한 현실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이 때문에 두려움을 잊기 위해 산이나 공원을 찾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순간이 잠시 동안은 휴식과 행복이 될 수 있으나 그 기간이 길어지면 무기력과 체념으로 이어지기 쉽다.
반면 우리 주변에서는 은퇴 후 인생 이모작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바리스타, 영어통역사, 숲해설사, 박물관 해설사, 택배기사 등 활동 분야도 다양하다. 이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생 이모작을 설계했거나 하던 일을 퇴직 후에도 살릴 수 있는 준비를 틈틈이 했다고 한다. 30년 이상 가졌던 직업을 뒤로 한 채 갑자기 새로운 일거리를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한국전력공사 지사장으로 퇴사할 때까지 인생 이모작 준비를 착실히 한 경우다. 여러 종류의 자격증을 땄으며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도 취득하였다. 이에 힘입어 동의과학대 전기공학과 교수로 근무하며 두 번째 인생을 살다가 퇴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의 자격증 시험과 교수 채용에서 여러 번 탈락한 적도 있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도전을 계속한 끝에 전기기능사와 전기산업기사를 양성하는 전기학원을 운영하고 경성대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보람된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돈이 개인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퇴직 후 수입이 급감하면 지인과의 만남을 줄이고 각종 모임에 빠지기도 한다. 은퇴자들의 사회생활을 ‘용돈’이 좌우할 정도다. 퇴직 후 수입이 없어 곧바로 궁핍한 생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 해법은 인생 제2막의 설계를 미리 잘하는 데 있다고 본다. 필자의 학원을 찾은 퇴직자들을 상대로 상담한 결과, 회사 다닐 때 노후의 삶을 고민하며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럴 경우에도 “지금도 늦지 않았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생각의 전환이 요구된다.
사람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도전하고자 하는 목표에 집착해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장애물을 피하려고 노력을 하면서도 100세 시대의 미래 설계는 신경도 안 쓰고 산다. 이러다가 막연한 상태로 정년퇴직을 한 뒤에야 다른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쓴다. 지금은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 출생) 퇴직자가 많은 까닭에 노년층은 단순한 일자리도 구하기 힘든 실정이다.
인생 이모작 설계를 위해서는 젊은 날 자신이 가장 잘했던 장점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좋겠다. 또 취업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거나 지금까지 국가와 회사로부터 받은 혜택에 감사해 앞으로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국내 제조업과 중소기업은 여전히 인력난에 시달리며 전문기술 자격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 퇴직자나 퇴직을 앞둔 사람이 민간 전문기술 자격증 또는 국가기술 자격증 취득에 도전할 것을 권한다. 기업들은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의 강화에 따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 자격증을 소유한 기술자를 확보해 안전사고를 줄이고자 한다. 앞으로 이 분야에서 취업 수요가 증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누구나 명심할 것은 기회는 준비하고 도전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점이다. 정년퇴직을 전후한 시기에 수입이 줄고 몸이 쇠약해지면 만나는 사람도 줄어들어 생활이 소극적이고 위축되기 일쑤다. 이럴 때 가족이나 지인과의 대화 단절은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치매를 유발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미리미리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장점을 찾아야 한다. 직업의 적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평소 취업·채용 박람회를 자주 찾아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것이다.
내년에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20%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다. 노후생활 자금을 각종 연금에만 의지한다면 나이가 더 들수록 힘들고 고립된 생활이 예상된다. 실업수당을 받는 동안 인생 이모작을 위한 자격증 취득에 도전하는 건 연금을 배로 늘리는 길일 수 있다. 전국적으로 다양한 직업박람회가 열리는 계절 5월이다. 노후의 자신에게 맞는 새 직업을 찾는 기회를 만들며 건강도 잘 챙기길 바란다.
2024-05-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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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문화예술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
필자는 대학의 최고경영자과정(AMP)이나 시민대학을 비롯한 사회단체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오면 ‘문화예술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이라는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한평생 행복을 추구하고 살아간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함 또는 그런 상태’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바쁜 일상의 현대인에게는 항상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
많은 철학자가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덕에 따라 탁월하게 발휘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하며 “최상의 좋음이 행복”이라고 했다. 영국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조건을 ‘주변 사물과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크고 작은 일에 열정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문화 불모지 부산 공연 환경 매우 열악
부산 문화 발전 위한 공연기획 보람 커
문화예술에 지방정부·기업 지원 절실
지역 예술·예술인에 대한 사랑도 중요
연주회 관람은 행복한 삶 실현하는 길
필자는 문화의 불모지라는 부산에서 그것도 힘들고 어렵다는 클래식 공연을 30년 동안 열정을 가지고 무대에 올리고 있다. 가족들에게는 평생 돈 안 되는 일을 한다는 핀잔을 듣고 있지만, 부산의 문화 지킴이 역할을 한다는 지인들의 칭찬도 자주 듣는다. 운명처럼 뛰어든 공연기획자의 길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해 주는 일로 판단해 후회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 처음 공연기획 사업을 시작할 시기에 부산에서 활동하는 민간 문화예술 단체는 손꼽을 정도였다. 당시 부산에서 유일한 오페라단인 나토얀오페라단의 마지막 사무국장을 맡았고 민간 오케스트라도 운영했다. 이때부터 클래식 공연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면서 지금까지 줄곧 공연기획자의 길을 걸어왔다.
현재 부산에는 많은 민간 오페라단과 여러 민간 오케스트라가 활동하고 있지만, 힘들고 어려운 현실은 30년 전과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정부 보조금과 지원금 없이는 제대로 된 오페라 한 편을 제작할 수 없고, 민간 오케스트라 역시 자생력을 가질 수 있는 역량이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 예술 분야는 지방정부의 지원과 기업의 메세나(Mecenat)가 절실히 요구된다. 메세나는 기업이 문화예술에 적극 지원함으로써 사회에 공헌하고 국가 경쟁력 제고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메세나는 기업뿐 아니라 시민들이 문화와 예술에 관심과 사랑을 갖고 동참하는 것이다. 부산에는 오페라단, 오케스트라단, 합창단, 극단, 실내악단 등 크고 작은 공연 단체가 많이 존재한다. 단체마다 시민들의 관심과 후원이 절실하며, 이러한 단체들이 활성화될 때 부산이 문화 불모지가 아닌 문화의 중심 도시가 되리라 확신한다.
10년 전 일본 고베의 한일 교류 연주회를 마친 후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발언한 히라노 고베시의원이 생각난다. 그는 시의원이 도로를 넓히고 항만과 교량을 건설하는 큰일도 중요하지만, 문화를 지원하고 육성하는 것도 정치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고베 총영사는 외교관의 입보다 멋진 공연이 훨씬 외교적이라고 강조했다.
인생에서 사랑을 받는 것도 좋지만 주는 것은 더한 행복감을 준다. 그 사랑의 대상이 예술이나 예술가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다. 사람이 태어나 예술가가 못 될 바에는 예술 후원자가 되는 것도 멋질 것이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공연 티켓 한 장 구입하는 것, 예술단체 후원 회원이나 후원 기업이 되어 주는 것이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초석의 하나라고 하겠다.
오는 24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K-아트팝 가곡의 밤’ 공연이 펼쳐진다. 이를 위해 우리 가곡을 세계에 알리려는 작곡가 김효근 이화여대 교수의 노력이 대단하다. 이날 공연에서 부산의 실력 있는 성악가들이 출연해 오케스트라 반주로 아름다운 우리 노래를 열창한다. 많은 관객이 와서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면 좋겠다. 이번 공연은 기업 메세나와 사회 공헌의 일환으로 문화 소외계층 300여 명을 초청한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무언가를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게 행복이다. 지금도 좋은 공연을 위하여 피땀을 흘리는 멋진 예술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아낌없는 성원과 후원을 부탁드린다. 4·10 총선이 끝나고 야외로 나들이하기 좋은 행락 철을 맞았다. 지역 예술인들이 힘든 가운데서도 공을 들여 마련하는 다양한 연주회로 나들이해 즐기는 것도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일 테다.
2024-04-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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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민주주의의 꽃, 유권자가 만든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지난 3월 28일 시작된 이후 전국이 선거 유세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번 4·10 총선에서는 전국 42곳에서 재·보궐선거가 함께 치러진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여야의 특권 쟁취를 위한 정쟁과 늦어진 총선 후보 공천, 불거진 이념 갈등 탓에 또다시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소리가 나올 법하다.
선거철을 맞아 늘 회자되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 대의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민이 가진 권력을 특정인에게 부여하여 4년간 다스림을 받았다면, 이를 준엄하게 심판하는 것이 선거이다. 이는 곧 유권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선거를 치르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투표와 개표 등 선거 관리를 위해 수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엄청난 선거 물품을 공급해야 한다. 지난 제21대 총선의 경우 8700만여 장의 투표용지를 인쇄하고, 3508개의 사전투표소, 1만 4330개의 투표소, 251개의 개표소를 설치했다. 여기에 TV 광고와 같은 선거 홍보 비용과 정당에 지급하는 선거보조금, 선거비용 보전 금액 등을 합쳐 총비용은 4102억여 원이 소요됐다.
그렇다면 선거를 치르기 위해 쓰는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모두 국민이 낸 세금으로 충당한다. 유권자가 투표를 하지 않으면 그 돈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투표를 통해 파생되는 가치를 살펴보자. 2023년 우리나라 예산은 638조 7000억 원이었다. 국회의원 300명이 4년의 임기 동안 운영해야 할 재정 규모는 2554조 8000억 원에 달하는 셈이다. 이를 전체 유권자 수인 4399만 4247명(2023년 기준)으로 나누면 유권자 한 명에서 파생되는 투표 가치는 약 5800만 원이다.
이처럼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선거에 유권자는 어떠한 기준으로 임해야 할까? 정당과 후보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다양하게 있겠지만, 정당별 정책과 후보자의 공약을 포함한 능력과 자질을 들 수 있다.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세부 기준은 경력, 학력, 전문성, 공적, 납세, 병역, 전과, 사회 공헌 등이다. 이러한 정보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제22대 총선 특집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자세히 공개되어 있다.
선거가 임박한 이 시점에서 유권자들은 혈연, 학연, 지연, 정당에 얽매이지 말고 후보자의 자질을 한 번이라도 꼼꼼히 살펴보자. 그리고 후보가 지역을 발전시키고 유권자들의 삶의 질을 높일 의지와 자격을 갖추었는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들이 의지하는 선거 정보에 있어 SNS(사회관계망서비스)는 중요한 매개이다. 하지만 왜곡된 정보와 가짜 뉴스 등이 알고리즘에 의해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유권자는 정보를 편향적,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 판단 능력이 흐려지고 있다. 따라서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선거·정치 정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건강한 정치 소통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인 ‘선거·정치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를 갖추어 거짓 정보들을 걸러내야 하는 것도 우리 유권자들의 몫이다.
선거는 정당과 후보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유권자다. 유권자의 참여 없이는 선거의 정당성을 찾을 수 없으며, 선거 결과 또한 유권자의 선택으로 좌우된다. 선거 과정의 공정성 역시 정당, 후보자, 선거관리위원회의 몫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유권자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유권자가 정책과 공약에 관심을 보일 때 선거는 정책 경쟁으로 발전할 수 있고, 유권자가 불법 선거운동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불법 선거는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유권자가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할 때 각 정당과 후보자들은 유권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공정한 선거문화는 유권자가 중심이 될 때 정착될 수 있는 것이다.
선거에 있어서 개인 한 사람의 주권 행사도 중요하지만, 함께 투표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선거문화는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봄꽃이 만발한 4월 10일 전국에서 치러지는 총선이 ‘내가 만드는 공명선거, 우리가 만드는 고품격 선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4-04-0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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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사월을 기억하는 민주공원
기억투쟁. ‘역사는 기억과 망각 사이의 투쟁’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행위가 아니고 지나간 사실들을 나열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의미를 가진 집단기억으로서 역사의 진실 문제와 맞닿아 있다. 강요되는 왜곡과 망각에 대항해 진실을 밝히는 활동을 기억투쟁이라 할 것이다. 기억투쟁은 소외되고 묻힌 기억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불러낸다.
곧 4월이다. 이달에 잊어선 안 되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특히 일부에서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일제 지배를 옹호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적만 미화하는 행태가 이어지는 오늘, 4·19혁명을 기억하는 의미는 각별하다.
“동포여 잠을 깨라! 짓밟힌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나라!” 부산의 고등학생들이 1960년 3월 24일 자로 발표했던 호소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의기에 찬 학생들은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다. 주인이 가져야 할 귀중한 열쇠들을 우리에게 고용당한 차인들에게 빼앗기고 있다”고 외치며 이승만 독재정권 퇴진운동을 일으켰다. 국민을 학살하고 부정부패에 몰입한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삶을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1960년 4월, 청년 학생을 비롯한 시민의 항쟁으로 이승만의 영구집권 음모를 막는 민주주의 승리와 민족통일 운동을 위한 새 역사가 창조되기 시작했으니 이를 4·19혁명이라 한다. 많은 희생이 따랐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4월 19일,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1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부산에서도 19명의 소중한 생명이 세상을 등졌다. 한 달 전 경남 마산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3·15의거가 일어나 9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했다. 마산상고 입학생이던 김주열 열사도 이때 희생되었다. 김주열은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돼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올랐다. 발견 당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으며 이는 전국적인 분노를 촉발해 4·19혁명의 불씨를 당기게 된다.
김주열 열사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한 주범은 친일파 경찰 박종표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아라이 겐베이로 창씨개명하고 헌병보로 근무하였다. 악질 형사 노덕술에 비견되기도 하는 박종표는 애국투사를 박해한 범죄행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후 반민특위 해산에 따라 형 면제로 풀려났다.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으로 복귀한 그는 시민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결국 김주열 열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일제 치하 애국투사를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한 친일 경찰이 해방 후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젊은이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친일파를 기반으로 한 역대 독재정권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독재자들은 정권 강화를 위해 친일세력을 필요로 했고, 친일파들은 독재의 비호 아래 ‘반공애국투사’ ‘근대화의 주역’으로 위장한 채 그 세력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해 나갔다.
반면 민주화운동 세력은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 시민 지지를 받으며 성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의열단 박재혁 의사와 함께 부산경찰서 폭파를 모의했던 최천택 선생이나, 신간회 동경지회 결성을 주도하고 청년운동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던 이종률 선생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부산에서 활동한 이 두 분은 독립운동가로서 4·19혁명의 주역으로도 활동하였으며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의 박해를 받았다.
‘4월 민주혁명 희생자 위령탑’과 영령봉안소가 설치된 부산 중구 민주공원 들목에는 최천택 선생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민주공원 늘펼쳐보임방에는 이종률 선생의 유고와 안경이 전시 중이다. 또 민주공원 부속건물로 건립 중인 기록관이 내년 개관을 앞두고 자료를 이용한 연구와 교육 활성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민주공원은 1999년 ‘부산시민의 숭고한 민주 희생 정신을 기리고 발전시키기 위해 살아있는 교육장’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시민의 휴식과 문화 활동에도 적합한 민주공원은 역사의 고비마다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결정적 역할을 했던 부산시민의 헌신을 기억한다. 그 위대한 발걸음에서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미래를 배울 수 있다. 시민과 함께하는 민주공원의 기억투쟁이다.
2024-03-2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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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싱가포르에서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을 생각한다
‘다른 도시에는 도시 속에 공원이 있지만, 싱가포르에는 공원 속에 도시가 있다.’ 이 말은 대체로 2010년까지만 유효했다. 지금은 아니다. 2010년 3월 매립한 해변 부지에 마리나베이샌즈호텔이 우뚝 솟은 이후 싱가포르의 스카이라인은 춤추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잘 가꿔진 공원과 첨단 항만으로만 승부를 겨루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최근 며칠간 싱가포르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이전에는 하루 이틀 머물다가 오곤 해 싱가포르의 겉모습을 보았다면, 이번에 일주일 정도 머문 덕에 싱가포르의 겉과 속을 고루 체험했던 셈이다.
부산시는 글로벌 허브도시로의 도약을 꿈꾼다. 정부는 부산을 국제 자유 비즈니스 도시로 키우려는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제정으로 뒷받침할 계획이다. 싱가포르는 부산이 글로벌 허브도시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이다. 싱가포르는 항만이나 물류 분야에서는 부산과 경쟁 관계에 있고, 관광 등 마이스 산업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게 많은 도시여서다. 더욱이 박형준 부산시장은 연초에 “2024년은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의 원년이 될 것”이라며 “한마디로 부산을 싱가포르에 비견되는 글로벌 허브도시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조용하게 보여도 치열하게 변신 중인 싱가포르의 몇 가지 특징을 소개한다.
우선 싱가포르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친다. 도심의 가로를 걸어가면 건물들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하며 이방인의 옷소매를 끈다. 예컨대 마리나베이샌즈, 가든스바이더베이, 사이언스파크, 싱가포르 플라이어 등의 건물은 유명 건축가들의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이들 건물은 화려한 야경도 자랑한다. 비즈니스맨이든, 관광객이든 죄다 야한 빛으로 홀려놓겠다고 작심한 것일까? 야간 레이저쇼는 홍콩의 밤을 조명과 음악으로 장식하는 명물 이벤트 ‘심포니 오브 라이트’가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다음으로 대규모 관광 위락 시설과 항만 시설의 재배치를 소리 없이(?) 진행 중이다. 종전에는 관광지구가 센토사섬이나 서쪽 지역의 주롱 새 공원 등에 한정되었다면, 지금은 해안 매립을 통해 도시 기능을 재배치하고 교통 거점마다 복합 쇼핑몰을 배치하고 있다. 매립→신축→개장→투자비 회수→재투자로 선순환 되는 것이다. 참고로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이후 2022년까지 국토 면적(719㎢)의 20%(140㎢)가 해안 매립을 통해 확장되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자율보다 규제, 즉 행정 강제력을 적극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종 ‘잘 사는 북한’이란 국제적인 조롱을 듣는 이유다. 결과적으론 도시의 경쟁력과 쾌적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다. 그 덕에 항만뿐만 아니라 도시 인프라와 대중교통 네트워크도 효율적으로 작동된다. 이층 버스, 전철 등 대중교통 비용은 하루 2달러 이하로 저렴한 데다 그랩(grab) 택시까지 잘 운용되고 있다. 한편으론 자율보다는 규제 우위로 인해 어쩐지 또 한 편의 영화 ‘트루먼 쇼’에서 조연이 된 기분도 든다.
부산항은 언제쯤 글로벌 메가 허브항으로 갈 수 있을까? 싱가포르항은 세계 1위 항만이면서 항만 자동화 수준이 세계 최고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 가죽은 탐이 나고 호랑이는 무섭다’는 말이 있다. 호랑이 가죽을 얻으려면 사나운 호랑이를 잡을 방도부터 찾고 실행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IT기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만 자동화율은 싱가포르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고 한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부산항이 글로벌 메가 허브항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부산만의 강점부터 살려 나갈 일이다. 강과 바다, 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삼포지향의 도시, 천연의 바다, 사철 변화무쌍한 금정산, 백양산 그리고 장산, 해안 따라 펼쳐진 갈맷길, 낙동강 변의 잘 가꿔진 자전거길, 광안대교에서 부산항·남항대교를 거쳐 가덕대교까지 이어진 해상 드라이브 길 등이 있다. 싱가포르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천혜의 조건이다. 아울러 부산만의 차별화된 요소인 영화의전당과 벡스코, 수리조선 산업 그리고 머지않아 열릴 북극 항로가 가장 큰 잠재력이다. 글로벌 허브항은 장기 목표로 하고, 시민이 행복한 도시 부산이 단기 목표가 돼야 한다. 글로벌 허브 이전에 싱가포르가 부럽지 않는 글로벌 행복 도시부터 만들 수 있다.
박원호 하우엔지니어링 부사장·기술사
2024-03-0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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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정월대보름에 오곡밥과 나물을 먹는 이유
세상 만물은 시작이 중요하다. 한 해의 출발은 봄이다. 입춘 후 오는 상원(上元)인 정월대보름(올해 2월 24일)은 특별하다. 설날부터 정월대보름 사이에 많은 세시풍속이 몰려있다. 또한 시작을 알리는 정월대보름까지는 금기시되는 것을 하지 않고 매사에 조심하고 조심해야 하는 정초 십이지일(正初 十二支日)도 있다. 올해는 청룡의 해인 만큼 상서로운 용의 기운으로 건강과 풍년을 소망한다. 그리고 첫 용날인 상진일(上辰日·2월 22일)에 약수를 길어다 밥을 지어야겠다. 지금은 물맛 좋은 우물이 사라지고 없으므로 동네 뒷산 약수터 약수로 대신해 보자.
설날이 가족의 날이라면 정월대보름은 마을 공동체의 날이다. 조선 세시풍속을 적은 〈동국세시기〉는 정월대보름에 오곡으로 밥을 해 먹으며 이웃과도 나눈다고 했다. 공동체에서 음식은 매우 중요하다. 같은 음식이 같은 생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식사가 어떤 식으로 준비되는가에 따라 인체가 서로 다르게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정월대보름 풍습으로 백가반(百家飯)이 있다. 어린아이가 동네 백 군데 집을 돌면서 밥을 얻어다 섞어 먹으면 액운을 피하고 복을 받으며 봄을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네를 누비는 과정에서 이웃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좋은 점도 있다. 아파트가 즐비한 요즘엔 같은 동 앞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핵가족화가 진행된 지 반세기도 안 돼 1인 가구도 급증했다.
정월대보름날 전국 곳곳에서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며 갖가지 풍속을 즐긴다. 대표적인 게 마을 공동 제사와 달집태우기, 줄다리기, 연날리기 등이다. 모두 풍요와 다산을 빌고 단결력을 높이는 공동체의식이 깃든 놀이다. 특히 예부터 정월대보름에 다섯 가지 곡식이 들어간 오곡밥과 묵나물 반찬을 즐겨 먹었다. 오곡밥에는 보통 찹쌀, 멥쌀, 기장, 팥, 쥐눈이콩이 들어간다. 오곡밥은 신진대사를 촉진해 소화가 잘 되게 하며 혈압을 조정해 면역력을 키우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묵나물의 기원은 우리 조상이 채소를 먹기 시작할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묵나물은 제철에 채취해 말려 놓았다가 이듬해 먹는 것으로, 햇살과 바람이 만들어낸 식재료다. 볕에 말리는 나물은 그 성질이 따뜻하게 변한다. 말린 나물은 비타민, 무기질, 식이섬유의 보고다. 말린 나물의 식이섬유는 비만과 변비 등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묵나물이 제맛을 내는 시기가 바로 정월대보름 전후다. 묵나물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박, 버섯, 호박, 무, 무 시래기, 고사리, 취나물, 가지 등을 말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나물은 삶아 햇빛에 천천히 말리면 어두운색으로 변한다. 그러면 검은색에 풍부한 색소인 안토시아닌이 생성된다. 안토시아닌은 동맥에 침전물이 생기는 것을 막아 피를 맑게 하고 심장 질환과 뇌졸중 위험을 줄여준다고 한다. 소염·살균 효과도 뛰어나다.
오곡밥과 묵나물은 색깔이 어둡다는 특징이 있다. 봄이 시작되는 시기에 검은색 음식은 겨우내 몸 안에 쌓인 습하고 건조한 기운을 부드럽게 하고 화기를 조절하는 조습연견(燥濕軟堅) 효능이 있다. 그리고 검은색은 인간의 지혜를 관장하는 색을 의미한다. 또 소생을 상징함과 동시에 만물의 흐름과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정월대보름에 오곡밥과 묵나물을 먹는 이유다. 여기에는 행동을 조심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날 단단한 견과류로 부럼 깨물기를 하고 차가운 귀밝이술도 마신다. 액운이나 질병을 막고 좋은 일이 생기기를 원해서다.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뚜렷해지는 봄의 기운은 추위에 움츠렸던 인체에도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한다. 몸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비타민이 필요하다. 비타민이 부족하면 몸이 나른해지고 졸음이 오며 식욕과 면역력이 떨어진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면서 양기가 점차적으로 많아지는 시기다. 이때 기름기 많은 음식을 적게 섭취해 양기가 몸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체내의 간을 안정시켜 오장육부를 조화롭게 할 수 있다. 오는 24일 정월대보름에 오곡밥과 나물을 먹으며 심신 건강을 다지고 옅어진 가족애와 공동체의식도 되돌아보면서 삶의 희망을 키우자.
2024-02-2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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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에 부산 미래 달렸다
두 달 뒤인 4월 10일 제22대 총선이 실시된다. 하지만 정치는 국민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갈수록 퇴행하고 있다. 연초부터 발생한 제1야당 대표와 여당 국회의원에 대한 피습사건. 그리고 아직도 결정되지 않은 선거구 개편과 거대 양당의 끝 모를 대결 정치는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많은 피로감을 느끼게 만든다. 여야 간 사생결단식 대결 정치와 상대를 향한 혐오와 적대가 난무하는 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이다. 이는 팬덤 정치 기반의 권력구조가 낳은 결과다. 거대 양당이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가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과 자당의 이익만을 좇는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스스로가 대결과 혐오 정치의 근절에 발 벗고 나서야 하며 국민을 위한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부산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일당 쏠림 현상이다. 20대와 21대 국회를 거치면서 일정 부분 해소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당 독점 현상이 강하다. 이로 인해 지역 발전은 더디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민에게 돌아간다. 유권자들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또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일으키게 된다. 지역 발전과 미래를 내다본다면 일당 독점 체제에서 벗어나 더 균형적인 정치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적절한 견제와 긴장은 지역 발전을 위한 더 나은 정책과 공약으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유권자와 언론에 비친 부산의 현역 국회의원들 모습은 어떨까? 중앙 정치에서의 존재감은 뒤로하고 과연 이분들이 부산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제대로 일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다지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 못할 것이다.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 산업은행 부산 이전, 반도체 특화단지 지정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정치권의 역량과 관심, 의지를 묻고 싶다.
지역 정치의 케케묵은 과제 중 하나가 정책 부재와 인물난이다. 〈부산일보〉가 지난달에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2회에 걸쳐 부산 지역 현역 의원들의 ‘지역 개발’ 공약을 점검해 보도했다. 도시철도와 대규모 복합개발 사업까지 4년 전 유권자들의 표심을 흔들었던 총선 공약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본 것이다. 확 바꾸겠다던 공약은 ‘그대로’ 상태에 머물러 있고, 도시철도 사업은 실체화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었다. 정책과 공약에 대한 철학의 부재이자 철저한 준비 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부산경실련이 작년 11월 지역 현역 의원들에 대한 자질 검증 결과를 발표했다. 의정활동(법안 발의 저조, 회의 결석률 등)과 도덕성(과다 부동산, 과다 주식, 사회적 물의 등)이 경실련의 검증 기준이다. 이 기준에 최소 1건 이상 걸린 부산 국회의원의 비중은 무려 83.3%(18명 중 15명)이다. 이 수치는 수도권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참고로 서울 41.2%, 인천 57.1%, 경기 49.2%이다. 경실련 기준으로 본다면 수도권에 비해 부산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들의 자질은 매우 낮은 것이다. 자질이 검증된 인물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거대 양당이 져야 하지만 유권자들도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할 대목이다.
다가오는 제22대 총선에서는 자질이 검증된 인물들이 등장하고 지역의 사회적 발전, 경제적 발전을 위한 좋은 정책들이 많이 제시되어야 한다. 부산은 2030월드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미래 먹거리에 대한 현실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또한 초고령 사회, 저출산, 높은 청년 인구 유출 등도 우리 부산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인 답은 앵커 기업 유치를 통한 지역 산업 육성과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여기에 모든 역량을 모아야 한다. 물론 부산시의 고민이 많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치권 역시 많은 노력과 의지를 보태야 한다. 부산의 미래 먹거리를 위한 정치권의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발전을 위한 올바른 정책을 갖고 있는 후보, 좀 더 자질 높은 인물들이 국회에 입성해야 한다. 결국 지역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에 부산의 미래가 달려 있는 셈이다. 앞으로 여야 총선 후보들의 면면과 자질, 능력을 철저히 따져보고 이들의 공약과 정책도 꼼꼼하게 살펴본 뒤 신중한 판단을 통해 반드시 한 표의 신성한 주권을 행사하길 바란다.
2024-02-0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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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방분권 위한 총선 공약이 필요하다
제22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70여 일 남았다. 국회의원 출마 예비후보자, 여당과 야당, 신당을 창당하려는 정치인들 모두 총선 승리에 사활을 걸고 각종 공약을 발표하고 있으나,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에 관한 공약은 보이지 않는다. 지방분권 운동에 15년 넘게 활동해 온 필자로서는 매우 실망스럽다.
2020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살고 있다.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정한 적정 의석수를 보면 수도권이 128석으로 지역구 253석의 절반을 넘어섰다. 수도권의 급격한 인구 증가 때문이다. 이처럼 수도권은 인구와 국회의원 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의료 등 전 분야에 걸쳐 모든 걸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으며, 지방은 소멸 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이제 수도권 주민들을 제외한 비수도권 주민들은 수도권 일극 중심주의의 폐해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방분권·지역균형발전, 시대적 요구
대통령 직속 위원회 추진 성과는 미흡
대안으로 ‘지역정당 허용’ 목소리 등장
총선 후보 자치분권 실현 공약 내놔야
시민단체·유권자, 여야에 촉구할 필요
그래서 노무현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5년 한시법으로 지방분권위원회 같은 위원회 조직을 만들어 지방분권 및 국토균형발전 정책을 실시해 왔으나, 공공기관 지방 이전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으로 5년 한시 조직인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방분권 및 국토균형발전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하고 있다.
지방시대위원회라고 명칭만 달리한다고 하여 지방분권 및 국토균형발전 정책이 제대로 시행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과거 20년간 지방분권 및 국토균형발전의 역사에서 보듯이 대통령 직속 위원회 조직으로는 정책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방분권 운동가들은 정부조직법을 개정해 부총리급의 국가균형발전부라는 행정 조직을 신설하라고 요구해 왔지만, 어느 정부에서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근래에는 직접 지역정당을 만들어 지방의회에 진출하고, 국회에도 진출하여 지방분권 및 국토균형발전 정책을 주체적으로 추진하겠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중앙 정치세력인 거대 양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자들이 대부분 당선되면서 지방정치의 중앙 예속화가 고착화된 상황을 타파하고, 정치의 지방분권화를 도모하기 위해 지역정당 설립이 하나의 해결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당법은 정당의 중앙당은 반드시 서울에만 두어야 하고, 5개 이상 시도 당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규정해 일정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지역정당의 설립을 원천봉쇄하고 있어 문제다. 그래서 지역정당 설립을 추진하던 단체가 지역정당 설립을 원천봉쇄한 정당법 조항에 대하여 헌법에서 보장한 ‘정당 설립의 자유’를 침해하여 위헌이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2023년 9월 26일 헌법재판소 헌법재판관 9명 중 과반수가 넘는 5명은 위헌이라고 판단하였으나, 위헌 결정의 기준인 9명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명에서 1명이 부족해 위헌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헌법재판관 5명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요지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명쾌하다. “지역정당의 출현으로 인한 지역주의 심화 문제는 정당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정치문화적 접근으로 해결하여야 하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전국 어디에서든 정치 참여가 가능하고 지방자치가 확대되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정당이 전국 규모의 조직을 갖추고 전체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정당 활동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전국정당 조항은 각 지역 현안에 대한 정치적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정당의 출현을 배제하여 풀뿌리 민주주의를 차단할 위험이 있다. 지역정당 배제는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에 종속시켜 지방정치의 활성화를 억지시키는 것이다.”
거대 양당은 지역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정당법을 개정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비수도권 시민사회단체들은 여야의 출마자들과 각 당에서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추진, 정당법 개정을 위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놓도록 촉구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이에 부응하는 총선 후보와 정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4-01-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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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HMM 매각, 한국 해운산업 명운이 달렸다
우리나라 최대 해운기업인 HMM의 매각을 둘러싸고 우려의 목소리가 커진다. 당초 기대와 달리 대기업은 불참한 채 자금 동원력이 떨어지는 중견그룹만 매각 경쟁에 뛰어들면서 ‘새우가 고래를 품는 격’이라는 지적에 이어 최근에는 노조까지 부실매각이라며 매각 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이번 매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영난에 빠진 현대상선(현 HMM)에 자금을 지원해 준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가 보유한 지분 57.9%가 대상이다. 지난달 인수가격으로 6조 4000억 원을 제시한 하림그룹 계열사 팬오션과 사모펀드 운용사인 JKL파트너스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고, 현재 최종 인수조건을 놓고 협상이 진행 중이다.
HMM의 자산 규모는 작년 4월 기준 25조 7880억 원으로 재계 19위인 반면 하림그룹은 17조 910억 원으로 재계 27위에 불과하다. 하림이 HMM을 인수하게 되면 단숨에 자산 42조 8000억 원으로 재계 13위로 급부상하게 된다. 1976년 육계사업으로 시작해 사료, 식품가공, 유통 등 종합 식품기업으로 성장한 후 2015년 국내 최대 벌크선사 팬오션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해운업에 뛰어든 하림이 HMM까지 품게 되면 종합 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
HMM은 국민 혈세로 살려낸 해운사
팬오션 보유 중견기업 하림 인수 나서
‘새우가 고래 품는 격’ 우려 시선 많아
투자금 회수 급급한 매각 추진은 안 돼
해운 경쟁력 강화 위한 국익 관점 필요
그럼에도 하림의 HMM 인수를 바라보는 업계의 시선은 불안하다. 먼저 하림그룹의 자금조달 능력이다. 현재 하림은 본인들이 제시한 인수대금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향후 HMM 운영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 의문이다. 하림 측은 인수대금의 절반가량을 인수금융으로 확보하고, 나머지는 재무적 투자자인 JKL파트너스로부터 5000억 원을 마련하며 부동산과 선박 매각 등 자산유동화를 추진한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다. 부족한 3조 원가량은 결국 팬오션을 통해 유상증자로 조달할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 이 경우 몸집이 작은 팬오션의 재무건전성이 악화될 위험이 크다.
이렇다 보니 하림은 HMM 주식배당으로 현금을 일부 조달하기 위해 영구채 주식 전환에 3년 유예를 요구했으나 동원그룹으로부터 공정성 위배라는 지적을 받고 철회한 바 있다. 더구나 매입에 성공하더라도 호황은 짧고 불황은 긴 해운경기의 특성과 미래 경쟁력 강화 때문에 친환경 선박 확보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점을 감안할 때 과연 자본 규모가 크지 않은 하림이 정상적으로 HMM을 운영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둘째, HMM이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벌어들인 10조 원 규모의 현금성 유보금의 전용 가능성이다. 자본조달 능력이 떨어지는 하림이 급한 대로 인수금융 조달 후 HMM이 보유한 현금성 유보금에 손대지 않겠냐는 우려이다. 이 경우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린 기업의 이익에 손을 댄다는 ‘먹튀’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행히 노조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하림 측은 해당 유보금을 HMM의 미래 경쟁력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금융논리를 앞세워 한진해운 파산을 경험한 당국이 국민 혈세를 투입해 살려낸 국내 최대 선사를 자금력도 부족한 기업에 매각하여 국가 기간산업의 미래를 맡기는 게 과연 최선의 선택이냐는 것이다.
이번 매각의 초점은 수출입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게 생명선과 같은 해운산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추진돼야 한다. 투자금 회수를 통해 재무건전성을 개선해야 하는 산업은행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나 시간에 쫓겨 졸속 매각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반드시 이번 매각을 성사시켜야 한다면 금융논리의 관점에서만 볼 게 아니라 국익 관점에서 해운산업의 전략적 중요성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매각조건을 엄중히 고려해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하림 또한 HMM 인수가 ‘승자의 저주’가 아닌 ‘신의 한 수’가 되기 위해선 HMM 인수의 진정성을 입증할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국내 최대 선사 HMM 인수는 특정 기업의 몸집 불리기 수단이 아니라 한국해운의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이는 기회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한 의지와 역량이 있는 기업이 HMM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2의 한진해운 사태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한진해운이 파산한 지 7년이 되는 다음 달 한국 해운산업의 명운이 결정될 것이다.
2024-01-1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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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새해를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 실현 원년으로
저물어가는 올해는 2030부산월드엑스포 유치 과정을 통해 국제도시 부산을 위한 시민과 각계각층의 열정적 노력과 단결된 힘을 확인한 의미 있는 한 해였다. 세계를 향해 제기한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 ‘자연과의 지속 가능한 삶’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이라는 부산이니셔티브는 부산이 글로벌 가치를 실천하고 확산하는 세계 속의 도시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비록 엑스포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정부는 부산을 위해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 북항 2단계 재개발, 한국산업은행 이전을 약속했다. 이들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부산이 글로벌 허브도시로 도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약속이 흔들림 없이 성공적으로 추진돼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글로벌 허브도시가 성공하기 위한 핵심 요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계의 주목을 받는 싱가포르나 두바이의 사례는 세 가지 허브전략을 제시한다.
첫째, 핵심도시를 중심으로 한 초연결 광역경제권으로 그 지역의 자연, 사회, 문화 및 산업의 특성에 맞추어 구축하는 메가시티 허브전략이다. 둘째, 핵심 거점도시-인근 중소도시-국제도시 간 통합 물류클러스터의 구축과 동시에 자본시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국제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금융물류 허브전략이다.
마지막은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들이 과감한 디지털?녹색 신산업 기술 및 원활한 금융 투자 지원을 통해 지역 앵커기업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혁신산업 허브전략이다. 메가시티 허브, 금융물류 허브, 혁신산업 허브전략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고 상호 시너지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할 중요한 요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 도시 및 환경 분야에서의 중앙 집중적이고 획일적인 행?재정적 규제의 과감한 개선과 철폐, 세제의 혁신적 개선 그리고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정부의 일관된 지방시대 정책의 추진 의지이다.
지난 6일 윤석열 대통령은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과 이를 추진할 범정부 거버넌스의 조속한 구축을 시민들에게 약속했다. 이는 수도권 일극화의 폐해를 극복하고 부산을 남부권 경제, 산업, 교육, 관광 등의 혁신적 성장거점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부산이 국가 발전을 견인하는 새로운 성장축의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지켜보는 시민들의 관심과 기대가 크다.
부산시는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가 성공하기 위한 네 가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고 세계적인 경제허브 기능을 수행하는 국제자유비즈니스도시, 둘째, 디지털 신산업과 금융물류산업의 혁신적 육성을 위한 그린스마트 혁신도시, 셋째, 국제적인 관광지 조성 및 관광 혜택 지원 등을 통한 글로벌 관광허브도시, 넷째, 살기 좋은 정주환경 조성, 외국교육기관 설립의 자율화 및 영어교육 규제 개선 등을 통한 글로벌 정주환경도시이다.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첫걸음은 시작됐다. 이는 정부 지역균형개발 정책의 실천 의지를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다. 특별법 제정은 부산이 직면한 3대 위기, 즉 인구·기후·일자리 위기를 선도적으로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부산은 그동안 도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적극 추진하면서 역량과 잠재력을 충분히 키워 왔다. 이제 기존 정책들을 글로벌 허브도시의 성공을 위해 효율적으로 재정비해 선택과 집중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와 역량이다. 준비해 온 부산의 잠재력을 속도감 있게 전개하고 축적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앞으로 범정부 협의체의 원활한 구성과 운영, 부산 핵심 특구 과제들의 발굴, 특별법을 지원하기 위한 기본구상 및 기본계획의 면밀한 수립, 법안 발의 및 통과를 위해선 부산시, 시의회, 시민이 하나가 되는 노력이 요구된다. 궁극적으로는 특별법이 부산의 발전만이 아닌 남부권, 나아가 대한민국 미래 발전의 견인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2024년을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 실현의 원년으로 삼자.
2023-12-2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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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해사법원은 부산으로!
‘제75조(분쟁의 해결) 본 계약으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분쟁은 런던 해상중재인협회 규칙에 따라 런던에서 중재로 해결한다.’ 이는 국내 선사와 국내 선박 건조 회사 사이에 체결되는 선박건조계약에 일반적으로 명시되는 분쟁 해결에 관한 조항이다. 세계 제일의 조선 능력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조선업체들이 계약의 당사자가 된 경우에도 선박 제조와 관련한 대부분의 법적 분쟁은 영국이나 싱가포르, 중국을 해결지로 정하고 있다. 국내에는 해양 관련 분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해사법원이 없기 때문이다.
해사법원의 부재는 국내 법원 해사사건 담당 재판부의 전문성 부족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사건 처리의 지연, 재판의 신뢰성 부족으로 귀결돼 결국 해사사건을 전문 법원이 있는 다른 나라에서 처리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국내 기업 간 분쟁조차 해외에서 해결하다 보니 우리나라가 영국 등 해외 소재 로펌에 지불하는 법률 서비스 비용만 연간 4000억 원이나 된다.
이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국내에 해사법원이 하루빨리 설치되어야 한다. 한국은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 세계 1위이며, 세계 2위 환적항이자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인 부산항을 보유한 해양강국이다. 하지만 이러한 몸집에 걸맞는 해양지식 산업의 발전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해양지식 산업 발전의 문을 열어줄 열쇠가 바로 해사법원 신설이다.
대법원이 2020년 9월 사법행정자문회의를 통해 해사법원 설립에 동의하는 의견을 밝힌 바 있어 다행스럽다. 윤석열 대통령도 2022년 대선 당시 해사법원 설치를 약속하였고, 현재 21대 국회에 각각 부산, 서울, 인천, 세종을 해사법원의 설립지로 하는 법안들이 발의되어 있다. 부산 설립안의 경우 안병길 의원(국민의힘)과 박재호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각각 발의해 부산은 여야가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이 해사법원 설치는 대통령과 대법원, 국회의원들의 동의가 있었으나, 설치 지역에 대해서는 다른 목소리가 나오다 보니 지역 간 갈등과 정쟁의 문제로 비화되어 몇 년째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더욱 답답한 것은 해사법원 신설 문제는 결국 법원조직법 등 법률을 개정해야 되는 입법 사항인데, 여야 간 극심한 정쟁으로 이 문제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어 발의된 각 법안들이 곧 자동 폐기될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연간 4000억 원의 법률 서비스 비용이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1984년부터 해사법원을 설립하여 운용하기 시작한 중국과의 해사 법률 분야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해사법원 설치 문제는 지역 간의 이익 조정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해사법원은 단순히 해사사건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법원 정도의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다. 해사법원을 통해 선박금융, 선박보험, 선박중개업 등 고부가가치 해양지식 산업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해사법원 설치는 대한민국의 해양산업 경쟁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다. 그리고 해사법원 설치는 해양지식 산업의 일자리 창출 효과도 매우 클 것으로 보이는 만큼 산업과 인력의 수도권 집중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정책의 하나로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70% 이상의 해양산업 관련 인프라가 집중되어 있고, 해양 관련 대학과 연구기관, 아태해사중재센터, 한국해양진흥공사 등 다양한 해양기관들이 몰려 있는 부산이 해사법원 설립의 최적지라고 하겠다. 게다가 부산은 글로벌 메가 허브 항만인 부산항이 있는 세계적인 해양도시인 데다 해양 실무 자격과 능력을 보유한 법조 인력이 많아 해사법원 설치 지역으로 제격이다.
우리나라의 해양산업 발전을 위해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해사법원 설치 지역을 반드시 부산으로 ‘선택’하여 대한민국 해양산업의 도약을 위해 부산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과 경남까지 함께 뭉쳐 정치권에 조속한 입법을 촉구해야 한다. “해사법원은 부산으로”를 외치고 있는 부산·울산·경남 지역 변호사들의 목소리만으로는 국회에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부울경 주민들의 단합된 목소리가 모아져야 한다.
2023-12-1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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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ESG 시민운동의 필요성
최근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의미하는 ESG 경영이 최대의 화두다. 이미 정부는 관계 부처 합동으로 ‘K-ESG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2021년에 전국 226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ESG 등급을 평가해 발표하였고, 2022년에는 전국 370개 공공기관 ESG 평가를 실시하였다. 2025년부터는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의 ESG 공시가 의무화되고 2030년부터 모든 상장사로 확대된다. 중소기업도 글로벌 ESG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 해외시장 거래가 어렵게 되고 대기업도 거래를 위한 ESG 기준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ESG 경영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편리하게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기후 위기를 불러왔고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ESG 경영을 도입한 근본적인 배경도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살려서 후손들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을 물려주자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정부와 기업에서 ESG 경영을 도입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현재 상태는 절반의 성공에 그치는 수준이다.
친환경·사회적 책임 중시하는 경영
지구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처방
개인과 가정에서도 적극 실천해야
전 국민 참여 운동으로 확산할 필요
정부·지자체의 관심과 지원 요구돼
남은 절반의 성공을 위해서는 ESG 시민운동이 필요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재 국내에서 한 해 동안 버려지는 플라스틱 배출량은 약 1000만 톤으로 세계 3위 정도다. 전국에는 235곳에 이르는 불법 매립 쓰레기 산이 있는데 악취 등으로 인근 주민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가 재활용 분리배출을 잘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통계상 재활용되는 비중은 27%에 불과하다. 미국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사이에 있는 북태평양 해역에는 우리나라 16배 크기의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라고 불리는 쓰레기 섬이 있는데 그중 10%는 한반도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9년 미국 뉴욕주립대 연구팀은 “9개 국가 11개 유명 브랜드의 생수 260병을 조사했더니 93%의 생수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고 보고하였다. 2022년 네덜란드 자유대학 연구팀은 “건강한 22명의 성인 혈액 중 80%에 가까운 17명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고 발표하였으며, 2023년 노르웨이 과학기술대학과 중국 난카이대학, 벨기에 헨트대학 등의 국제연구팀은 생수 1㎖당 나노 플라스틱이 1억 6600만 개가 들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러한 심각성 탓에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대응, 안전 및 보건 등 다양한 ESG 이슈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인 만큼 ‘ESG 경영은 정부와 기업이 예산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이므로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ESG 경영이 강조하는 친환경을 위해 물, 전기 등의 자원을 절약하고 쓰레기를 줄이고 재사용하면서 불필요하거나 환경 부담이 큰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등의 실천은 개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또 차별받거나 소외되는 이웃이 없도록 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사회적 책임 역시 가정에서 적극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중시되는 부패 방지, 원칙과 공정, 남에게 피해 주지 않기 등도 가정의 실천이 요구되는 일이다.
올해 진행된 ‘신라대 ESG 시민운동 전문강사 양성과정’의 워크숍에서 제기된 의견들을 바탕으로 5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ESG 시민운동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둘째, ESG 시민운동에 각 기업체의 적극적인 동참이 절실하다. 셋째, 지상파 방송과 유튜브 등에서 일회용품 사용 장면 방영을 절제해야 마땅하다. 청소년들의 모방심리를 자극하는 흡연 장면을 방영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넷째, 일회용품 사용이 많은 장례식장에서의 6찬 식판 사용의 권장이 필요하다. 일부 지자체는 장례식장에 다회용기를 세척해서 공급하는데 그보다는 6찬 식판을 사용하고 식기세척기를 설치해서 일회용품 사용을 근절했으면 한다. 앞으로 정부나 기업의 ESG 정책을 수립하는 담당자뿐 아니라 시민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일상생활에서 ESG를 실천하는 범국민적 운동이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2023-11-2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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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위험한 축제는 존재 의미 없다
18번째 불꽃축제를 무사히 마쳤다. 부산불꽃축제는 운영 노하우가 잘 축적된 행사라 다른 지역 기획자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정말 부산불꽃축제는 18년간 큰 사고 없이 몇몇 작은 사건만 있었을 뿐이다. 1회 행사 때 어떤 고위직 인사가 귀갓길 도로에 갇혀 생리현상에 쩔쩔맸던 일, 비+바람+파도 3종 세트가 동시에 들이닥쳐 바지선이 해변으로 떠밀려 온 사건, 그로 인해 하루를 연기했던 사건 정도가 있었다. 취객과 자원봉사자가 멱살 잡고 싸우다가 축제가 시작되자 사이좋게 같이 불꽃을 보는 일이 있었다. 불꽃 소리에 놀라 사산한 강아지 값을 물어내라는 사건도 있었다. 축제의 연속성을 고민해야 할 정도의 큰 사고는 없었다. 그렇다고 매번 편하게 행사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 한 번도 날씨 걱정을 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올해는 10월 중순부터 청명한 가을 날씨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산불꽃축제는 쉽게 가는 법이 없다. 불꽃축제 당일인 11월 4일, 그날만 비가 온다는 예보였다. 그것도 행사 취소를 검토해야 할 정도의 비바람이 온다는 예보다. 행사 7일 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을 때, 조직위 직원들은 태연하게 매뉴얼을 준비한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닌 것이다. 실시간 기상정보를 바탕으로 행사 개최, 취소, 연기를 결정할 수 있는 논의 프로세스를 설계한다. 매일 회의가 진행된다. 올해는 행정안전부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무관, 차관, 장관에 이르기까지 광안리 현장을 방문했다. 사전 안전 점검 차원이었다. 우천과 강풍, 시민 안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매일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지하철역 계단 미끄럼 방지 테이프까지 요구할 정도로 정부는 안전에 진심이었다. 우리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통상 해왔던 다른 일을 내려놓아야 할 정도로 안전과 관련한 추가적 조치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불꽃축제 당일이 되었을 때 우리는 종합상황실의 CCTV 모니터만 쳐다보며, 무전기 소리와 카톡방에 묻혀서 그날을 온전히 보냈다.
불꽃축제 준비가 한창일 때, 많은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 예전에는 행사의 내용, 주제, 출연자 등 축제의 흥미 요소가 주로 거론되었다. 언젠가부터는 밀집, 사고, 안전, 화재, 분산과 같은 위험 요소를 중심으로 질문과 답이 오간다. 사회적 참사, 팬데믹을 지나오며 우리는 사회 구석구석에 있는 위험 요소를 기어이 찾아내어 그 불씨를 빨리 꺼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적어도 119 신고 정도는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대규모 인파가 모이는 축제에 대한 걱정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코로나라는 터널을 지났고, 마스크를 벗고 모이기로 했으며, 함께 즐기기로 했다. 여러 사회적 참사를 돌아보며 규범과 절차를 강화하기로 했다. 더욱 강화된 규칙 안에서 조심스레 다시 축제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태원 참사 1주기에 우리는 불꽃축제를 준비했다. 수십만이 모이는 축제다. 위험해지도록 가만 놔두지 않는다. 정부, 경찰, 소방, 그리고 시민들이 매섭게 쳐다보고 있다. 이제 위험한 축제는 없다. 준비가 미흡해 취소된 축제가 있을 뿐이다. 축제에 있어서 안전은 선택이 아닌 기본이 되었다.
불꽃축제를 부산시 문화예술과에서 담당하던 때가 있었다. 민선 6기부터 축제의 관광 기능 강화를 목표로 불꽃축제, 바다축제, 록페스티벌 등이 담당 부서가 바뀌어 지금의 관광진흥과에서 담당을 하고 있다. 축제를 문화예술 콘텐츠로 바라보느냐, 관광요인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에 따른 배치일 것이다. 지금은 사회적 안전에 대한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기 때문에 축제를 위협요인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축제 담당 부서를 안전정책과로 바꿀 수는 없다. 축제는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험하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하거나 미루거나 해서는 안 된다. 강화된 안전매뉴얼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창의적이고 매력적인 콘텐츠를 선보이면서 도시와 관광의 기능을 극대화해 나가야 한다. 안전한 축제에 대한 공동체의 반복적 경험이 축적되어 갈 때, 축제를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관점도 점차 회복될 것이다. 아니 필히 회복되어야 한다. 지상 최대의 축제인 부산월드엑스포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2023-11-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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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김춘수의 시 ‘꽃’은 지독한 인간 중심의 근대주의적 오만으로 재해석되었다. “너에게는 내가 불러 주기 전에도 충실한 너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1만 2000년 인간종의 영속은 유별한 인간의 특이한 능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안정되고 변화가 예측되는 기후 특성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존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기를 인간과 자연이 서로 평화스러운 관계에 있다는 뜻을 가진 ‘홀로세(Holocene)’라고 부르고 있다. 2000년 화학자 파울 크루첸과 유진 스토머가 제안한 학설로서, 새로운 지질시대의 개념으로 ‘인류세(Anthropocene)’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운석 충돌과 같은 힘을 가진 것으로, 홀로세라는 지질학적 시대 구분은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중순부터 10월까지 도서출판 산지니에서 총 15회에 걸쳐 열린 독서아카데미 ‘기후위기와 문학의 대화’는 이러한 인류세 시대에 대응하는 문학예술의 처지를 담담히 진술하고 토론하는 귀한 자리였다. 독자로서 또는 생태시민으로서 또는 게으르고 둔감한 환경운동가에게도 이러한 기후위기 시대 문학적 상상력의 연찬은 생태주의적 존재의 연원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흔하지 않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앞머리 독회의 주제 도서는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로 강의와 토론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기후시대적 대응으로서 인류는 이제 지구 행성에 대한 권리의 행사보다는 지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의 요청으로서 인간 스스로가 자연의 거대한 힘들에 필적할 만한 지질시대 즉 인류세에 도래했기 때문에 비인간을 포함한 전체 행성의 미래가 이제 의식적인 힘의 결정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다.
인도 작가 아미타브 고시의 〈대혼란의 시대〉에서는 기후 변화는 그간 인간이 저질러 온 모든 행동이 집약된 종착역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를 추동해 온 근대의 정치이념인 ‘자유주의’는 실패한 것이 된다. 그는 문제의 해법으로서 종교적 지도력과 시민행동이 기후위기 시대의 주요한 힘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프로젝트의 중심이랄 수 있는 작품 읽기는 아직은 드물지만 기후위기를 주요한 주제와 배경으로 한 시와 소설이 추천되고 우리 지역의 작가들이 참여한 작품에 대한 소개와 평가가 이어진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정광모의 소설 〈토스쿠〉였다. 도저한 물질의 파도에 표류하는 생명 파괴의 현대 문명 속에 ‘자아’를 찾아 고투하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는 듯하였다. 인물들은 돌아오는 안개 속의 바다에서 ‘플라스틱 바다’라고 불러야 마땅한 곳에서 길을 잃는다. 갈 길을 잃어버린 작품 속의 인물들을 통해 인류세를 맞고 있는 인간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 너무나 감감하였다.
작가 정영선의 평설로 진행된 김초엽 소설가의 〈지구 끝의 온실〉은 일종의 SF소설로서 기후위기 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결코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생존에 대한 간절한 연대라는 것을 대재앙 이후 살아남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있었다.
시인 최정란의 해설로 가졌던 시(詩)의 독해는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문명의 바깥으로〉를 통해 백무산 시인, 고 허수경 시인, 김혜순 시인을 불러내어 생명과 평화를 넓게 읽는다. 특히 김혜순은 ‘피어라 돼지’라는 시에서 2011년 구제역 파동으로 300만 마리의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이 곧 죽임의 구덩이에 빠진 인간들임을 보여 주는 듯하였다.
“인간 세계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자연이 현실적으로 인간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폭력을 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반격을 가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이것이 인류세에 근원적인 인간 현상의 문제의식으로 떠오르면서 그렇다면 다시 기후위기 시대 인간 세계의 존재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어찌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겁고 그리고 깊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2023-11-0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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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매체에 의해 기억되는 역사들
얼마 전에 TV 예능인 ‘벌거벗은 세계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조선인을 잡아다가 해외 노예로 판 것이다. 그 숫자가 무려 10만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백성이 일본과 해외에서 노예 생활을 했을까?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 주인공인 ‘쿤타 킨테’ 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흑인만의 것인 줄 알았는데 우리 민족의 역사라니, 가슴이 저리고 분노가 일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접하면서 하나의 진실에도 여러 개의 해석이 있으며 당시의 교육 방향성에 따라 은폐되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깨달음은 언제부터인가 교육현장에서 대학 진학에 유리한 영어, 수학, 국어, 과학 등만을 중시하는 세대들의 역사의식은 어떨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지식과 정보가 쏟아지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에 의한 지적인 편중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몸담아 있는 나라의 역사에 무관심한 것은 문제가 있다. 치매에 걸린 ‘나’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듯 내 나라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기억을 잃은 자와 다름이 없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기억하기란 주체의 깨달음이 침투해 있는 어떤 과정”이다. 매체라 할지라도 이를 통해 접하게 되는 한국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깨닫게 하는 기억하기의 일종이다.
한국사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
국민 정체성·주체성 깨닫게 해
다양한 매체 통한 역사 교육 유행
일부 예능서 오류·왜곡 발견되기도
역사적 시각의 객관화 필요한 때
‘매체를 통한 기억하기’는 역사를 흥미롭게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의 위정자에 의해 이미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기초적인 역사 지식을 쌓고, 여러 시각이나 가치관으로 해석한 역사들을 접한다면 전후 맥락을 살펴 현실의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될 것이다. 사회적 텍스트로서 매체의 내용들은 교육현장을 통해서 고착화된 역사적 사고를 유연하게 할 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혀 준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용들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 등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각색하고, 역사 토크쇼 등의 예능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역사학자보다는 입담이 좋은 인기 강사를 선호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역사적 진실보다는 시청률을 우선순위로 두는 방송의 특성으로 인해서 잘못된 사실의 전달이나 오류를 범할 때도 있다. 2020년 ‘벌거벗은 세계사’의 강연자인 설민석의 역사 왜곡 논란은 단편적 역사 해석이나 오류를 보여 준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초적인 역사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왜곡된 역사의식을 심어 준다.
매체에 의한 기억은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요즘 언론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위안부나 건국 시점의 논란은 원하지 않아도 기억되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식민지 시대를 근대화의 초석이라 보는 뉴라이트 계열의 사람들은 건국 시점을 광복절로 보고 있는 반면 항일 운동사를 대한민국 근간으로 보는 민족주의 계열의 사람들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을 건국 시점으로 보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역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을 두고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이런 논란이 역사학자가 아니라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의해 주장된다는 점이다. 이분법의 논리로 양분화되어 있는 사회적 현실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역사적 해석에 동조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처해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교과서가 개편되고, 나라의 정체성과 주체성이 양분화되어 있는 이런 현실은 미래의 주역인 세대들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대중매체에 의해 역사가 기억되는 일은 이제 일상이다. 역사적 사실의 홍수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 국민의 몫이다. 다양성과 여러 가치관이 인정되는 글로벌 시대이지만 내 나라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만은 미루어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역사적 시각의 객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3-10-18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