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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대통령의 격노
격노(激怒). 격렬하게 분노하다, 그러니까 몹시 화를 낸다는 뜻. 단어 자체에 벌써 거칠고 급박한 기세가 역력하다. 지난 2년 동안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된 보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언론 보도를 통해 접했을 뿐, 실제로 대통령이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대통령의 언행을 묘사하는 이 말이 뉴스에 끊임없이 나온다는 게 문제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자신의 사적 감정을 주변에 표나게 드러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격노 사례는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만 살펴봐도 부지기수다. 윤 대통령은 이미 검찰에 있을 때부터 격노가 잦았다고 한다. 2020년 4월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은 ‘검언유착’ 사건과 관련해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감찰을 개시하겠다는 보고를 받고는 격노했다. 이 장면은 한동수 전 대검찰청 감찰부장의 저서에 자세히 서술돼 있다. 지난해 3월에는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 맞춰 블랙핑크 공연이 추진되다 무산된 적이 있는데, 이때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실제로 국가안보실장의 교체로 이어졌다.
지난해 연말에도 격노설이 불거졌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 체제로 가기 직전에 당시 김기현 당 대표가 사퇴를 거부하자 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것이다.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선 이후에는 김건희 여사 특검 문제가 거슬렸던 듯하다. 총선 이후 특검을 받는 조건부 방안에 대한 검토가 거론되자 이에 대해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그리고 해병대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 사건. 당시 박정훈 대령이 해당 사단장을 수사 대상으로 올렸고, 대통령이 이러면 누가 사단장을 하느냐면서 ‘VIP가 격노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이 VIP 격노설은 지금 특검 정국의 향방을 가늠할 열쇠를 쥔 사안이다. 일각에 의하면, 지난 9일 기자회견 뒤에도 대통령이 격노하는 등 대통령실에 소란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적 감정의 표출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왕조 시대에나 통하는 스타일이다. 특히 공적 영역에서 사적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리더십은 21세기 민주공화국에서 용납되기 힘들다. 물론 격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분명하게 내야 한다. 관건은 분노의 방향이다. 분노해야 하는 일에 분노하지 않고 분노할 이유가 없는 일에 분노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요 국민들에겐 최악의 모욕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2024-05-1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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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복권 호황 시대
지난 4일 제1118회 로또 복권 추첨에서 1등 당첨자가 19명이 나왔다. 1등 당첨자 19명쯤이야 이젠 흔한 일이 됐는데, 기이한 건 당첨번호였다. ‘11, 13, 14, 15, 16, 45’가 1등 당첨번호로 뽑힌 것이다. ‘13, 14, 15, 16’이라는 숫자가 연달아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다. 연속번호 당첨은 지난달 20일 1116회 추첨에서도 발생했다. 그때 1등 번호는 ‘15, 16, 17, 25, 30, 31’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로또 관련 조작설 또는 음모설이 다시 불거지게도 됐다.
복권 당첨번호 조작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1등 번호가 ‘1, 2, 3, 4, 5, 6’처럼 6개 전체가 연속돼도 통계적으로 발생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수개월 동안 안 나오는 1등 당첨자가 우리나라에선 매주 수십 명이 나오는 것도 당첨 확률이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40배나 높기 때문이란다. 이런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도 보이는데, 영국에선 4082명, 필리핀에선 433명, 일본에선 167명, 독일에선 137명이 1등에 당첨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정부의 공식 해명이니 믿지 않을 이유는 없겠다.
그래서인지 근래 복권 사는 사람이 엄청 늘었다는 소식이다. 이는 복권 판매액에서 확인되는데, 복권 수탁사업자인 동행복권에 따르면 지난해 역대 최대인 6조 7507억 원을 기록했다. 2018년(4조 3848억 원)과 비교하면 5년 새 54%나 늘어난 금액이자, 정부의 당초 예측치인 6조 7429억 원을 넘어선 것이다. 올해에도 판매 예상액(7조 2918억 원)을 초과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런 추세에 따라 정부는 내년 복권 판매 예상액을 지난해보다 1조 원 가까이 늘어난 7조 6879억 원으로 산정했다. 이 불황의 시기에 복권 판매만 호황을 누리는 듯하다.
이렇게 복권이 많이 팔리는 현상에 대해 고물가 등으로 허리 휘는 서민들의 반발심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보통의 직장인으로선 월급만으로는 살 수 없는 요즘 아닌가. 김밥 한 줄 사 먹기도 부담이 돼 복권 당첨의 환상을 더 키울 수밖에 없는 형편인 사람들이 일종의 한풀이를 한다는 이야기다. 최근 미국 로또 1등에 당첨돼 우리 돈으로 1조 8000억 원을 받은 라오스 출신 미국 이민자가 암 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암에 걸리더라도 그런 돈 한 번 만져 봤으면 좋겠다”는 푸념이 새삼스럽지만은 않은 게 지금 세태다. 서글프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
2024-05-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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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나는 뒷것이다”
최근에 들려온 ‘뒷것’이라는 낱말은 생소했다. 말뜻이 궁금했는데 TV 방송에서 답을 얻었다. 얼마 전 종영한 SBS 3부작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반향이 컸다. 짤막한 유튜브로 설핏 봤다가 결국 본방까지 사수하게 됐다는 이들도 많다. 거기서 김민기는 말했다. “나는 뒷것이고, 너네는 앞것이다.” 알고 보니 뒷것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뒤에서 남 돕는 일을 묵묵히 수행한 그의 인생을 축약한 말. 뒷것의 삶은 숨은 행보였으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큐를 보고서야 반세기 동안 ‘뒷것’으로서 ‘앞것’을 키워낸 사례가 차고도 넘쳤음을 알게 됐다.
1970~80년대, 그의 노래는 줄줄이 금지곡 족쇄에 묶였더랬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정치적 구호와 저항의 목소리를 분출한 적 없다. 그저 후미진 곳의 절박한 삶에 귀 기울였을 뿐이고 거기 깃든 장삼이사들의 애환을 낮게 읊조렸을 따름이다. 뒷것의 삶이란 본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안에 품고 있는 법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1970년대 보안사 취조실에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다가 도리어 고문하는 이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 때문에 이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그래서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이가 김민기다.
금지곡이 풀리고 ‘학전’ 대표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을 때도 뒷것의 태도가 낳은 풍경은 여럿 펼쳐진다. 그는 학전을 배우와 가수들이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뛰노는 무대로 만들었다. 공연자들과 계약서를 작성해 최저 임금을 보장했고, 기여도에 따라 공연 수익도 배분했다. 정식 직원인 스태프들에게는 4대 보험까지 제공했으니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아동극에도 깊은 열정을 쏟았다. 티켓값을 저렴하게 책정해 많은 어린이가 공연을 즐기도록 했고, 운영난 속에서도 어린이 공연을 20년 동안 고집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 역시 세대의 뒷것으로서의 큰 사랑이었던 것.
뒷것의 삶이란 쉽게 말하면 ‘큰어머니’ 같은 역할이다. 김민기는 수많은 공연과 무대를 기획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앞것’인 배우들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에게 영광을 돌렸다. 낮은 골짜기로 흘러드는 물처럼 스며들어 바닥을 든든히 다진 사람. 어쩌면 윗세대 우리 어버이들의 삶이 바로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런 헌신과 희생이 사회를 떠받치고 미래 세대를 지켜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뒷것 김민기’의 길은 투병을 넘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4-05-0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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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무당적 국회의장
권위주의 시절에는 대통령이 국회의장을 지명하기도 했다. 임명된 국회의장은 직권상정, 날치기 통과 등을 통해 청와대에 충성을 표시해야만 했다. 청와대 지시에 따라 의장이 날치기 처리에 나서거나 여당 단독으로 의안을 처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오죽했으면 국회를 법률 제정 기관이 아니라 법을 통과시켜 주는 ‘통법부’ ‘거수기’로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국회의 존재감을 낮잡아 봤다.
이에 반기를 든 국회의장이 이만섭 전 의장이다. 그는 16대 전반기 국회의장 취임 일성으로 “저는 앞으로 이 자리에서 의사봉을 칠 때,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며, 또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바라보며 ‘양심의 의사봉’을 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국회의장은 여당과 야당 중 어느 한 정당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결정을 내리고, 여당과 야당의 이해관계보다는 국민의 이익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자신의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4대 잔여 임기 국회의장을 맡았다가 청와대의 예산안 날치기 처리 요구를 거부하는 바람에 중도 낙마했던 이 전 의장은 “날치기만은 안 하는 의장이 되겠다”라고 선언했다.
이 전 의장은 재임 시절인 2002년 국회법 20조 2항(국회의장 당적 보유 금지)을 통과시켰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됐다. 국회법에서 ‘무소속 국회의장’을 정한 것은 그만큼 다수당에 휘둘리지 않고, 국회를 공정하게 운영하고, 중재자적 역할을 제대로 맡으라는 취지다. 하지만,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들이 “민주당에 유리하게 국회의장직을 수행해야 한다” “국회의장은 중립이 아니다” “다음 선거 승리를 위해 토대를 깔아줘야 한다” “긴급 현안은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 “기계적으로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발언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헌법 제46조 2항에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들의 중립성 포기 발언의 목적이 국가 이익인지, 민주당 이익인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전 의장은 회고록 〈날치기는 없다〉에서 “시간이 흐르면 국회의장이 국회를 굳건히 지키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겁니다. 국회는 여당의 국회도, 야당 국회도 아닙니다. 오직 국민의 국회입니다”라고 설파했다.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2024-05-0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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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누들플레이션
여름이면 콩국수 집이나 냉면집 앞에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이런 걸 보면 우리 민족은 면(麵)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면은 한자어다. 영어로는 누들(noodle)이다. 우리는 통상 국수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을 사용한 지는 오래됐다. 고려 말 중국어 학습서 〈노걸대〉에 “우리 고려인은 습면(濕麵)을 먹는 습관이 있다”라고 했고, 〈노걸대언해〉에서는 습면을 국슈(국수)로 번역했다. 이외에도 옛 기록에 국수는 면이나 탕병(湯餠) 등으로 나온다. 면은 국수를 지칭하는 단어이자 밀가루라는 이중의 뜻으로 사용됐다.
한반도에서 국수나 면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메밀이 주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밀가루를 재료로 한 국수 요리가 많아진 것은 해방 후 수입 밀가루가 많아지면서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메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냉면이다. 우리나라에 냉면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려 말로, 몽골에서 전래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49년에 쓰인 〈동국세시기〉이다. 여기에는 “메밀국수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 섞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관서 지방의 냉면, 그중에서도 평양냉면의 맛이 일품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평안도는 예부터 메밀의 주산지였다. 가정에서 누구나 즐겨 먹던 평양냉면은 통상 19세기 말부터 상업적인 음식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19세기 무렵 평양냉면을 파는 식당들이 서울에도 세워졌고, 1911년에는 평양에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이 생길 정도로 대중적인 외식 음식이 됐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냉면을 여름철 찜통더위 때 먹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원래 냉면은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다. 겨울에 추위를 찬 것으로 다스린다는 뜻의 이냉치냉(以冷治冷)은 바로 추운 겨울에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찬 냉면을 먹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최근 서울권 냉면집들이 냉면 가격을 1000~2000원씩 올렸다. 여름철 대표 면 요리로 꼽히는 콩국수 가격 역시 인상됐다고 한다. 서민을 대표하는 칼국수와 짜장면 가격도 올랐다. 이 때문에 국수(누들)에 인플레이션을 합친 누들플레이션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외식이 잦아지는 시기다. 지갑 열기가 참 두렵다. 정부가 물가와의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서민의 허리는 휘다 못해 부러져 버릴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사치를 줄이면 그만이지만, 누군가는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다. 이젠 여름철 별미마저 마음 놓고 먹기 힘든 시대가 됐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4-05-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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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신애치슨 라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아주 부유한 나라’를 방어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그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 최근 호는 대선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방위비를 더 내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보도했다. 실제 철수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분담금 인상을 노린 것으로 보이지만, 인터뷰의 맥락을 곱씹으면 착잡함이 남는다.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에 대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답변은 단호했다. “우리도 거기 있을 것”이라며 즉각 개입 의지를 밝혔다. 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은 답변 자체를 거부했다. 한국과 대만은 협상용이란 뜻일까? 이 대목에서 한국전쟁을 촉발한 애치슨 라인이 겹친다. 1950년 당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구 소련과 중국을 봉쇄할 목적으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채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선을 그은 것이 애치슨 라인이었다.
지난해 한국에서는 신애치슨 라인이 구가됐다. 미중 갈등을 배경으로 미국은 한국과 일본, 대만으로 구성된 ‘칩4 동맹’을 띄웠다. 반도체 경쟁력 덕분에 미국의 ‘반도체 방위선’은 한국 삼성전자·SK와 대만 TSMC를 아우르게끔 그어졌다는 해석이다. 이를 두고 확장된 신애치슨 라인이라는 명명까지 나왔다. 국가의 미래가 초격차 경쟁력에 있기 때문에 산업단지를 짓고 파격적인 지원책을 쏟아부어야 “신애치슨 라인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한데, 확장된 신애치슨 라인이란 개념은 어쩌면 김칫국부터 마신 꼴일지도 모른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선임연구원으로 있던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전하는 현지 분위기에서 한국은 존재감이 없다. 미국에서 열리는 주요 반도체 포럼마다 한국이 배제되기 일쑤라는 것이다. 케네디스쿨에서 열린 한 반도체 심포지엄 사례는 충격적이다. 로니 채터리 전 백악관 반도체조정관이 제시한 글로벌 공급망 지도에 한국과 대만이 없더라는 것. 박 전 장관은 “반도체의 미래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이 담겨 있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고 했다.
경기도 용인의 SK 반도체 클러스터는 용수난과 전력난에 주민 반대까지 겹쳐 사업 착수 5년인데도 조성 공사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삼성도 마찬가지. 그사이 일본은 한국과 대만이 각각 북한과 중국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논리로 미국과 일본이 전략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설득 중이다. 지난해와 정반대 의미에서 한국과 대만이 배제되는 신애치슨 라인이 부상한다면 막을 수 있을까.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
2024-05-0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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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가마우지의 얄궂은 운명
가마우지라는 철새가 있다. 대부분 해안에서 생활하지만 큰 강이나 호수에서도 볼 수 있다. 큰 것은 몸길이가 70~90㎝에 달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민물가마우지가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새는 헤엄을 치다가 잠수해 물고기를 잡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데 이 능력이 가마우지의 운명을 얄궂게 만들었다.
가마우지는 오래전부터 ‘물고기 사냥의 명수’로 불렸다. 타고난 사냥 실력을 보유한 가마우지를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가마우지를 길들여 물고기 사냥에 이용했다. 이른바 가마우지 낚시법이다. 가마우지가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목 아래에 끈을 묶고 사냥을 시킨 뒤 잡은 물고기는 빼앗았다. 일은 가마우지가 다 했지만 그 성과물은 사람의 차지였다. 636년에 발간된 수나라 역사책 〈수서(隋書)〉에 고대 일본의 전통 낚시법이라고 소개돼 있다고 하니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듯하다. 어로법이 독특했는지 이탈리아 선교사 오도릭(1265~1331)이 쓴 〈동방기행〉에도 실려 유럽 사람들에게 동양의 신기한 풍물로 알려졌다고 한다.
한때는 일본의 한 경제평론가가 일본에 핵심 부품이나 소재를 의존하는 한국 수출 구조의 취약성을 빗대 ‘가마우지 경제’라고 말해 파장이 일기도 했다. 목줄(부품·소재)에 묶여 완제품 수출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 과실은 일본이 취한다는 점을 조롱한 것이다. 가마우지의 뛰어난 물고기 사냥 실력이 비꼼과 조롱의 소재가 된 셈이다.
최근 가마우지는 또 한 번 그 천부적인 능력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달갑지 않은 처지에 놓였다. 원래 러시아 연해주나 사할린이 서식지였던 가마우지가 기후변화 탓인지 점점 우리나라의 텃새로 습성이 변해 강가 등에 그대로 눌러앉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텃새가 된 것까지는 괜찮은데 물고기 사냥 실력으로 가는 곳마다 민물고기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 경남 산청의 경호강이나 덕천강, 경북 포항의 형산강 등 강 유역 주변 농어민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호소다.
지자체의 호소에 가마우지는 결국 지난해 말 환경부에 의해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됐다. 이후 일부 지자체는 최근 아예 엽사까지 동원해 직접 사냥에 나섰다고 하니 가마우지로선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한때는 구경조차 쉽지 않았던 가마우지였건만 상황이 급변하니 이젠 인간의 총질만이 사나워진다. 이 모두 가마우지의 물고기 사냥 실력을 탓해야 하나.
2024-05-0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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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최저임금의 딜레마
산업혁명은 왜 프랑스나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시작됐을까. 경제학에서 100년 넘게 뜨거운 주제였다. 영국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고임금을 원인으로 설명했다. 영국의 임금은 다른 나라에 비해 4~5배 높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산 효율의 향상에 적극적이었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기계 도입에 앞섰다. 반면 저임금 산업예비군에 안주한 다른 나라는 혁신에 뒤처졌다.
중국은 지역별 최저임금이 다른데 광둥성은 최상위권이다. 국내총생산 비율에서 수십 년째 중국 1위를 차지했던 광둥성은 해마다 두 자릿수로 임금을 올렸다. 문제는 고임금을 좇아 농민공이 광둥성으로 몰리면서 광둥성과 접한 지역은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린 것.
최근 한국에서는 임금 차등화 논의가 봇물을 이룬다. 강원연구원은 올 초 ‘강원도형 최저임금제’를 제안했다. 최저임금을 낮춰 기업 유인과 인구 유입 효과를 노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원도 인력이 유출될 수 있다거나 유수 기업이 저임금을 노려 올 리 만무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서울시의회에는 노인 일자리 활성화를 위해 65세 이상은 최저임금을 제외하자는 건의문이 발의돼 세대 차별 논란을 불렀다.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할 최저임금심의위원회가 구성돼 5월 중순 첫 회의를 갖는다. 이번에는 ‘시급 1만 원’의 험산도 버티고 있지만, 차등 임금제가 일으킬 삼각파도가 심상치 않을 전망이다. 업종별 차등제는 사문화된 규정이었으나 정부는 ‘돌봄 노동’ 등에 적용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민생토론회에서 외국인 가사·돌봄 노동자 임금 차등화를 제시했다.
최저임금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이익 집단화된 노사 모두 만족하지 않는다. 올해도 장외전부터 뜨겁다. 차등이 ‘차별적이고 위헌적’이라고 노동계는 반대한다. 막판에 노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의장을 뛰쳐나가는 구태 재연이 불을 보듯 뻔하다. 졸속 심사가 벌써 걱정된다.
앞선 국내외 사례를 보면 임금의 추이는 고차방정식을 따른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뜻밖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개인에게 임금은 생계뿐만 아니라 연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산업 구조 변화의 요인으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올해 최저임금 심의 시한은 6월 27일로 6주에 못 미친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사회적으로 중차대한 의제가 결정되는 구조다. AI(인공지능)와 로봇이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다. 그에 걸맞게 최저임금을 심의하는 조직과 과정을 혁신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24-05-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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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K성형의 명암
서울 강남 압구정동은 ‘세계 성형수술 중심지’로 불리는 한국에서도 ‘성형 1번가’로 꼽힌다. 그 비싼 임대료에도 건물 1곳당 성형외과가 하나꼴로 입주해 있을 정도다. 건물 전체를 성형 등 미용 관련 콘셉트로 채운 곳도 있다. 전국에서 전교 1등 한 애들은 다 압구정에 모여 있다는 우스개도 성형외과 의사들을 빗댄 말이다. 이런 압구정이 최근 외국인 성형 관광객들로 다시 북적인다고 한다. 호텔마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외국인이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란다.
한국은 명실공히 성형 대국이다. 최근 미국 매체 〈인사이드 몽키〉가 국제성형의학회 데이터를 근거로 ‘미용성형 대국 톱 20’을 선정했는데 한국이 인구 1000명당 8.9건으로 1위였다. 20대 한국 여성 4명 중 1명이 쌍꺼풀, 코 수술을 받았을 것으로 매체는 추정했다. 한국은 성형외과 의사들의 기술력도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다. 미국은 물론이고 남미나 동남아시아 의사들이 배우러 온다. 이런 배경 때문에 K팝 아이돌이나 K드라마 주인공처럼 되겠다며 한국을 찾는 성형 관광이 성황을 이루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 성형 대국으로 급성장하는 동안 한국의 성형 문화는 외신의 조롱과 비난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13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참가자들의 외모에 차별성이 없다며 ‘성형 시스터즈’로 조롱하는 보도가 논란을 촉발했고 강남 성형외과에 설치된 턱뼈를 가득 담은 유리 상자를 ‘턱뼈탑’으로 희화화하는 보도도 있었다. 여성들의 뾰족해진 턱을 빗살무늬토기에 비유하며 놀리는 글이 인터넷 게시판을 달구기도 했다. 최근에는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대한민국 성형 대국이 자부심이자 고통인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미성년자까지 성형으로 몰리는 외모지상주의 문화의 이면을 비판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환자가 처음으로 60만 명을 넘어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고 지난 29일 발표했다. 그런데 이들 한국 의료 관광에 나선 외국인 환자 중 절반 이상은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찾았다. 국가별로는 일본, 중국, 미국 순이었다. 필수의료 공백에 따른 의대 증원을 둘러싸고 의정 갈등이 격화하고 있는 와중이어서 마냥 반길 수만도 없는 소식이다. 28일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피부비만성형학회 춘계학술대회 경연장에 의정 갈등으로 사직한 전공의들이 줄을 섰다는 소식까지 들려 씁쓸함을 더한다. 이게 지금의 대한민국 의료 민낯이다.
2024-04-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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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백일해 유행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서정시 ‘승무’ ‘낙화’로 유명한 조지훈(1920~1968). 1971년 독재정권을 비꼰 ‘애국자’란 시로 등단한 뒤 경남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고 환경 파괴를 경고하는 시를 많이 쓴 이선관(1942~2005).
성향이 매우 다른 작품 세계를 보여준 두 시인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갓난아이 적에 호흡기 질환의 하나인 백일해(百日咳)를 심하게 앓았다는 것. 조 시인은 생전에 보기 드물게 키가 180cm나 되는 거구였으나, 아주 어릴 때 앓은 백일해 후유증으로 몸이 허약해져 평생을 질병에 시달리며 고생했다. 이 시인은 한 살 무렵 겪은 백일해 약물 중독 탓에 생긴 뇌성마비 2급 장애를 멍에처럼 지고 살아야 했다.
백일해는 한방에서 “기침이 100일을 간다”고 한 데서 유래해 붙여진 명칭이다. 보르데텔라균(Bordetella pertussis, 그람 음성균)에 감염돼 발생하는 제2급 법정 감염병. 이 질환은 처음엔 미열이 있는 감기처럼 시작해 가벼운 기침을 하지만, 2~3주째 증상이 악화하면 “흡” 소리와 함께 발작성 기침을 한다. 기침이 심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막히며 구토 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만 해도 백일해로 죽는 영아가 많았을 정도로 영유아에게 치명적이다. 비말을 통해 전파된다. 정부는 1954년부터 디프테리아·파상풍 백신이 들어있는 DTP 백신으로 영유아 예방접종을 권장했다. 그러다가 1989년 DTaP(개량형 백일해 백신)를 국가필수 예방접종에 포함하자 백일해 발생 빈도가 눈에 띄게 줄면서 퇴치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전국에서 어린이·청소년을 중심으로 백일해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24일까지 발생한 백일해 환자는 365명. 지난해 같은 기간 11명에 비해 33배가량 늘었으며 최근 10년간 가장 많은 수치다. 올해 같은 기간 부산에서도 전국 시도 가운데 세 번째 많은 47명이 감염됐다. 그동안 가끔 국지적으로 소수의 발병은 있었지만, 이같이 유행 수준인 건 이례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시기 철저했던 방역 체계와 개인위생 준수가 엔데믹(풍토병) 전환 이후 크게 느슨해진 영향일지도 모른다. 머잖아 인구절벽으로 국가소멸이 우려된다는 초저출생 시대가 아닌가. 아동과 청소년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소중해진 만큼 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보건 당국과 어른들의 각별한 신경이 요구된다.
2024-04-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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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뒤늦은 해원
대한민국의 1982년은 어떻게 기억되나. 먼저 떠오르는 건 프로야구 출범이다.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를 시작으로 프로야구가 첫선을 보였는데, 날마다 경기하는 프로야구의 탄생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물론 당시엔 알지 못했다. 정권 기반이 취약한 신군부가 국민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던 이른바 ‘3S’(Sports·Sex·Screen) 정책의 소산이었음을. 새해 벽두인 1월 5일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37년 만에 해제돼 유흥·윤락 업소가 크게 늘어났고, 영화계 쪽에는 성 묘사 검열 수위가 낮아져 에로영화가 범람했다. 그해 사회적 풍경들이 그랬다.
또 한편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의식을 틀어잡기 위해 부심했다. 4월 10일 시작한 ‘의식개혁 국민운동’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를 비웃듯 경찰에 의한 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진다. 4월 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 오지마을에서 일어난 ‘우 순경 사건’. 우범곤이라는 순경이 지서에서 총기와 실탄, 수류탄을 탈취한 뒤 마을 사람들에게 무차별 난사했다. 56명을 죽이고 34명에 중경상을 입힌 희대의 살인극은 본인의 자폭으로 끝났다. ‘건국 이후 가장 쇼킹한 사건’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다. ‘최단 시간 최다 살상’으로 한동안 기네스북 기록에도 올랐다.
사건 전반을 보면,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광기를 부리는 동안 경찰의 신속한 대응은 없었다. 우 순경은 평소 난폭한 성격과 술버릇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의령경찰서 중 가장 오지인 궁류지서로 좌천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결국 경찰의 부실한 채용·인사 시스템이 낳은 참사였던 셈. 하지만 군사정권의 보도 통제로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했다. 경찰은 공권력의 상징이다. 경찰 내부에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잊힌 시간이었던 이 사건의 희생자 추모 행사가 42년 만에 처음으로 열렸다고 한다. 26일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4·26 추모공원에서 진행된 위령제와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은 긴 세월 억누른 눈물을 쏟아냈다. 추모 움직임이 공식 시작된 건 2022년이었다. 그때 의령군이 추모공원 조성과 위령탑 건립 계획을 세웠다. 현재 추모공원 공사는 막바지 작업 중인데, 이번 추모식은 42주기에 맞춘 위령탑 완공과 함께 이뤄진 것이다. 늦어도 너무 늦은 해원(解寃)이다. 유족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기를 빈다.
2024-04-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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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황매산 철쭉제
매년 이맘때가 되면 지천으로 피는 꽃이 철쭉이다. 산자락에서부터 능선을 타고 선홍빛으로 흐드러지게 피는 철쭉은 그 색깔과 영롱함에 반할 수밖에 없다. 봄의 대표적인 꽃으로 분홍색, 빨간색, 흰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철쭉이란 어원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척촉(척촉)’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가던 길을 더 가지 못하고 걸음을 머뭇거린다’라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철쭉 하면 떠오르는 여인이 수로부인이다. 〈삼국유사〉 헌화가에는 신라 성덕왕 시절 천 길 벼랑 끝의 철쭉이 아름답다고 하여 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로부인에게 꺾어서 바친 이야기가 나온다. 수로부인은 그 노인에게 “한 다발 꽃분홍 철쭉이 나를 부르네/ 아프고 괴로웠던 추운 시절 잊게 하네/ 암소 끌고 오신 이여/ 꽃 바친 그 정성으로 올해 농사 가물지 않도록/ 천지신명이여 굽어살피소서”라고 답가를 보냈다고 한다. 철쭉은 전통 결혼식에서 신부의 머리에 꽂는 꽃으로도 사용되었을 만큼 한민족과 오랫동안 함께했다.
꽃의 계절이다. 만개했던 벚꽃이 꽃비가 되어 흩날린 지 며칠 만에 계절의 여왕인 5월이 다가왔다.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축제도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먹고 마시는 축제부터 눈을 즐겁게 하는 꽃 축제까지. 영남에서 꽃과 관련한 대표적인 축제가 경남 산청 황매산 철쭉제다. 오는 27일부터 5월 12일까지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황매산 일원에서 열린다. 태백산맥의 마지막 준봉으로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는 황매산에는 5월 초부터 철쭉이 산상 화원을 이룬다. 황매산 해발 800~900m의 평원에 철쭉이 만개한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올해 철쭉제 주제는 ‘산청, 철쭉에 물들다’이다.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어느 가수가 “바람의 향기 불어와 철쭉 꽃비가 내리면/ 그 옛날의 사랑이 그리워지네/ 나 그곳에 가리라/ 옛사랑의 추억을 찾아서/ 이렇게 그리운 밤에는 철쭉 꽃비가 내린다”라고 열창했다. 철쭉은 향기가 없지만, 그 가수에게는 바람에 실린 사랑의 향기가 느껴졌나 보다. 철쭉이 피는 이 계절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 철쭉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기억을 통해 우리네 신산한 삶에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번 황매산 철쭉제에서 모처럼 사랑도 고백하고, 철쭉의 선홍빛에 물드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꽃처럼 잠시라도 해맑을 수 있다면….
2024-04-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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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퇴계, 향산, 양산
지난 총선 때 한 후보가 자신의 저서 중 퇴계 이황의 사생활 관련 표현이 문제가 돼 곤욕을 치렀다. “감히 퇴계를 모독하느냐”며 유림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공맹에 견줘 이자(李子)로 칭송되는 성인을 폄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실 퇴계가 대학자이자 민족의 사표라는 데 이론을 달 이는 별로 없다. 더구나 그는 매서운 절의(節義)를 가진 선비이기도 했다. 초야에서 정진하며 후진을 양성한 은인(隱忍)의 학자로 흔히 알지만, 이는 퇴계의 절반만 아는 것이다.
그의 본래면목이 잘 드러난 시가 ‘절죽(折竹·꺾인 대나무)’이다. ‘강항오조좌(强項誤遭挫·굳센 목덜미가 잘못 꺾어져도)/ 정심비소파(貞心非所破·곧은 마음이 깨지는 것은 아니어라)/ 늠연립불요(凜然立不撓·늠름히 서서 흔들리지 않으니)/ 유감격퇴나(猶堪激頹懦·오히려 무너지고 나약한 자를 격려한다네).’ 퇴계가 63세 때 지은 이 시에는 어떤 어려움에도 절의를 지킨다는 선비의 의연한 기상이 갈무리돼 있다.
퇴계의 절의는 대를 이어 전해졌고, 그 절정이 11세손 향산 이만도(1842~1910)다. 어려서 퇴계학을 전수받은 향산은 평소 선비로서 뜻 세움을 중히 여겼다. “뜻을 세우는 건 가슴에 대못 박는 것과 같아서 한 순간이라도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그의 부친도 마찬가지여서, 향산이 25세에 장원급제하자 “조정이 너를 죽을 자리에 두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선비의 책임을 다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향산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후학 양성과 학문에 몰두했다. 이후 일제의 침략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그는, 1910년 한일병탄이 발표되자 “죽음 말고 무엇이겠는가”라며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절했다. 안타깝게도 향산의 순절은 당시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향산이 선비로서 보여준 삶과 죽음은 망국지경에서 지식인의 선택과 결단이 어떠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만든다. 그의 자취를 좇아볼 법도 한데, 마침 양산시립박물관에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열리는 ‘양산군수 특별전’이다. 조선시대 양산에 부임해 칭송받은 역대 군수들의 면모를 소개하는 전시인데, 대상에 향산이 포함됐다. 향산은 1876년 양산에 부임해 목민의 의무를 다했다. 전시를 찾는다면 향산의 절의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성싶다.
2024-04-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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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부산시 '금주 구역' 조례
미국 위스키 잭 다니엘의 본거지는 테네시주 무어 카운티(Moore County)인데, 정작 이 지역 식당이나 상점에서는 이 세계적인 토산주를 구입하거나 마실 수가 없다. 무어 카운티는 연방 금주법 폐지 뒤에도 주류 판매와 음주가 불법이어서다. 이런 지자체는 알코올이 증발해 버렸다는 비유로 ‘드라이(dry) 카운티’로 불린다. 그 반대는 ‘웨트(wet) 카운티’. 미국에서 500곳 이상의 지자체가 아직 ‘드라이’ 상태다.
유럽은 술에 너그러울 것 같지만 상당수 국가가 늦은 밤과 새벽에 주점에서 주류 판매를 금지한다. 영국 스코틀랜드는 과음을 막기 위해 주류 최저 가격제 MUP(Minimum Unit Pricing)까지 도입했다. 싼 맛에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취지다.
조선은 건국 때부터 금주가 ‘디폴트’(초기 설정)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술’ 키워드로 읽으면 금주령과 현실론의 투쟁사다. 임금들은 끊임없이 금주령을 내렸지만 결국 솜방망이였다. ‘거리에 술병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어명을 내렸다가 ‘술주정하는 것만 금한다’며 단속을 완화했다. 다시 금주론이 강경해지자 ‘고기와 생선 안주 금지’라는 웃지 못할 고육책으로 음주를 억제하려 했다.
실록에는 임금 앞에서 만취 신하가 궁녀를 희롱하거나,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사를 부려 망신한 사례까지 나온다. 영의정 정인지는 술주정의 꼭짓점이다. 작취미성으로 어전에 나와 임금과 문답을 못하는 건 예사. 불콰해져 세조에게 ‘너’라고 하대하거나, 불교 심취를 비난해 술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파직과 귀양은 가볍고 목을 베야 한다고 신하들이 들끓었다. 세조는 요지부동으로 정인지를 두둔했다. “취중 실수여서 죄를 물을 것도 못 된다!” 주사에 관대한 내면 의식의 면면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부산의 어린이집·유치원, 공원, 정류장 등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하다 적발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부산시의회 이종진 의원이 발의한 ‘건전한 음주문화 환경조성에 관한 조례’ 개정안이 지난 2월 본회의를 통과해 금명 시행된다. 이 조례로 지자체는 ‘금주 구역’ 지정과 단속·과태료 부과 권한을 갖게 됐다. 그간 너그러운 음주 문화 탓에 잘못된 음주 행태에 대한 예방 시스템이 없었다. 그사이 부산 음주율은 전국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 조례를 계기로 ‘음주 TPO’, 즉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을 따지는 성숙된 음주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2024-04-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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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도시 입장료
“소음과 사생활 침해 때문에 도저히 창문을 열고 살 수가 없다.” “평일·주말 안 가리고 사람들이 몰려와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간다.”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세계 주요 관광지 주민들의 하소연이다.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침해하는 과잉 관광(Overtourism)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부 관광지에선 주민들이 앞장서서 “이젠 제발 그만 좀 와 달라”고 할 정도다.
아프리카 서북부 해역에 위치한 카나리아제도는 스페인령 군도다. 화산 지형과 연중 내리쬐는 햇살로 유명해 전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이곳엔 주민 220만 명의 7배가 넘는 16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 그러자 수만 명의 주민들이 ‘관광 중단’이란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와 관광객들에게 항의하는 일이 최근 벌어졌다. 이러한 과잉 관광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그리스 산토리니, 일본 오사카, 필리핀 보라카이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제주도와 서울 북촌 한옥마을, 부산 감천문화마을 등이 비슷한 경우다. 과잉 관광이 문제가 되자 지난해 초 프랑스에서는 루브르박물관의 하루 방문객을 4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제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최근 연간 방문객이 2000만 명을 넘자 새 숙박 시설을 건설하지 않기로 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다. 한때 25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쪼그라들어 지금은 5만 명에 불과하지만, 관광객은 매년 2500만~3000만 명이 찾고 있다. 이렇게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생활이 힘들게 되자 베네치아는 오는 25일부터 당일치기 방문 관광객을 대상으로 도시 입장료 5유로(약 7000원)를 부과하기로 했다. 6월부터는 단체 관광객 수를 25명으로 제한한다. 도시 입장료 부과는 세계 도시 중 처음이다.
이제 과잉 관광은 전 지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베네치아가 도시 입장료 부과까지 들고 나왔을까. 전문가들은 과잉 관광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칫 관광지로서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에서는 인간과 지구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관광의 책임 있는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마침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온실가스 발생을 줄이기 위해 탄소 배출 감축에 노력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 모두 이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2024-04-22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