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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대통령의 소통, 진정성 필요하다
10일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윤 대통령은 이에 맞춰 하루 전날 기자회견을 갖고 국정 운영과 각종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2022년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이어 1년 9개월 만에 두 번째 열린 공식 기자회견이었다. 이번 회견은 윤 대통령이 취임 초기 출근길에 행한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을 중단한 지 500여 일 만에 마련한 실질적인 첫 대국민 접촉이다. 그동안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실패 관련 발언,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 담화, 신년 대담 등 형식으로 대통령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밝히기는 했다. 그런데 질의응답이 오가는 공개 기자회견은 오랜만이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없앤 민정수석실을 새로 설치하기로 했다. 이날 즉시 김주현 전 법무부 차관을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다. 대통령실에서 매우 약해진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민정수석실 복원 이유다. 지난달 29일에는 윤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간 회담이 열렸다. 이는 윤석열 정부 들어 처음 성사된 영수회담으로, 실종된 여야 협치의 가능성이 엿보인 데 의의가 있다.
여야 영수회담, 민정수석실 부활, 대국민 기자회견. 연이어 벌어진 일들은 의미와 파급력이 작지 않다. 이 사안들만 놓고 단편적으로 봤을 때는 윤 대통령이 소통을 중시하고, 이를 위한 실천에 노력하는 걸로 착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세 가지는 자발적이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는 게 엄연한 진리다. 애초부터 선제적이고 능동적인 계획에 의해 추진된 것이 아니어서 그 의미를 반감한다. 대통령이 정치적 어려움에 처한 나머지 위기를 모면하거나 돌파구를 찾으려는 궁여지책에서 비롯됐다.
이런 사실은 윤 대통령이 평소 영수회담을 원치 않은 데서 먼저 확인된다.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거야의 협조가 필요한데도 민주당 이 대표의 수차례에 걸친 회담 제의를 무시했다. 각종 형사사건 피의자인 이 대표를 대통령과 동급으로 예우하고 강력한 대선주자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싫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중론이다. 민정수석실도 마찬가지다. 대선후보 시절 사정기관 장악 등에 악용된 민정수석실 폐지를 자주 강조하며 공약으로까지 내걸었던 윤 대통령이다. 그러다가 야당의 우려에 아랑곳없이 민심 파악을 내세워 부활시킨 것이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이 2022년 11월 이후 소통 부재라는 여론의 지적 속에서도 더는 이행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9일 기자들과 문답을 주고받은 쌍방향 기자회견도 안 내켰을 테다. 대통령실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취임 2주년 기자회견 진행 여부를 두고 전망이 갈렸을 정도다.
꿈쩍하지 않던 윤 대통령이 소통에 관심을 보이며 국민 및 야당과 대화에 나서도록 만든 건 제22대 총선 결과다. 대통령의 태도 변화는 민주당이 최종적으로 무려 171석을 차지하고 국민의힘은 108석 확보에 그친 집권 여당의 참패에 기인한다. 더욱이 선거 참패가 윤 대통령의 오만하고 독단적인 불통식 국정운영 탓이란 지적이 여당 안팎에서 잇따르는 실정이다.
총선 직후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8.0%가 윤 대통령을 총선 참패 책임자로 꼽았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목한 이는 10.0%에 불과했다. 심지어 여당 지지층은 윤 70.4%, 한 11.3%로 대통령의 책임을 더 무겁게 여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20%대 중반~30%대 초반의 바닥 수준을 보일 수밖에 없다.
최근 윤 대통령의 잇단 조치는 총선 패배로 수세에 몰려 낮은 지지율을 의식한 산물이긴 하지만, 아집과 독선이 강했던 이전과 다른 모습인 건 분명하다. 윤 대통령은 상반된 여야 평가가 나온 9일 기자회견에서도 “여야 정당과 소통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많이 늦은 감이 있으나 남은 임기 3년을 위해 고무적인 자세다. 윤 대통령의 취임 일성은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긴 가장 중요한 이유로 국민과의 소통을 든 바 있어서다. 더 이상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 나가며 국민 신뢰를 높여야 할 때다.
그러려면 진정성이 관건이다. 대통령 자신이 소통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소통 방법에 변화를 보이지 않을 경우 진정한 소통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먼저 국민 곁으로 바싹 다가서고, 특히 고물가·고금리에 힘겨운 서민과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앞으로 3년간 주력해야 할 민생 안정 등 원활한 국정수행에 절실한 여야정 대화와 협치를 잘 이끌어 내도록 열린 마음과 겸허한 자세도 요구된다. 국민 행복을 위해 환골탈태한 소통을 바란다. 진보·보수층 다수가 지지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까닭이다.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
2024-05-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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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거대 양당제 고착화한 4·10 총선
이달 10일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야당의 압승, 여당의 완패였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은 전체 300석의 과반을 훨씬 넘는 175석을 차지했다. 조국혁신당 같은 범야권까지 감안하면 192석으로 늘어난다. 반면 여당 국민의힘은 위성정당 국민의미래를 포함해도 108석에 그친다.
압도적인 성적표에 고무된 민주당은 총선이 끝난 지 보름도 안돼 또다시 절대다수 의석의 힘을 동원해 입법 독주 행태를 보인다. 민주당 등 야당은 지난 23일 국회 정무위원회를 열어 민주유공자법 제정안과 가맹사업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하도록 요구하는 안건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전자는 ‘운동권 셀프 특혜’ 소지가 있어 여권은 물론 국민 상당수가 반대할 정도로 논란을 빚는 사안이다. 후자는 가맹점주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한 것으로, 본사·점주 간 이해관계가 첨예해 갈등 해소를 위한 숙의와 신중한 입법이 요구된다. 앞서 18일 본회의로 직회부된 양곡관리법 등 5개 법안에 이어 야당의 두 번째 단독 처리다. 민주당은 다음 달 30일 임기가 시작되는 22대 국회에서 논의해도 괜찮을 쟁점 법안들 통과를 21대 국회 막바지에 밀어붙일 태세다.
민주당은 입법 강행을 위해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받들겠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불통과 독단, 여당의 무능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이 민주당의 승리로 귀결됐다는 분석은 맞는다. 하지만 야당이 확보한 의석만큼 국민이 민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해석하는 건 민의를 잘못 읽은 게다. 다분히 독선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다.
실제로 민주당이 전국 지역구 161석을 휩쓸게 지지한 유권자는 민주당 후보들에 투표한 50.45%다. 겨우 절반을 넘겼다. 이와 5.4%포인트 차이에 불과한 45.05%의 유권자는 민주당보다 71석이나 적은 90석을 얻은 국민의힘 후보들에게 표를 줬다. 민주당이 한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자만 당선되고 나머지 후보를 선택한 표는 모두 사표가 되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 덕을 톡톡히 본 것뿐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 총선 민심을 빙자해 입맛에 맞는 법안들을 강행 처리하는 데 치중하며 여당과의 대화와 협치를 잊은 듯한 민주당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4·10 총선은 정치 개혁과 민생 안정을 외면한 채 여야 간 정쟁으로 일관해 정치 불신과 혐오감을 키운 정치권과 국회를 준엄하게 심판하지 못한 꼴이 됐다. 여야는 선거 과정에서도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인적 쇄신이나 유권자가 기대한 비전·정책 대결 없이 친윤석열·이재명계 후보나 부적격자 공천, 사생결단식 상호 비방 등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도 민주당과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각각 180, 103석을 나눠 가진 21대 국회와 흡사한 구도를 만든 이번 총선으로 거대 양당제만 공고해진 셈이다.
거대 양당 간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지금 상태라면 22대 국회는 정쟁이 더 격화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대선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양당이 당리당략으로 사사건건 충돌하고 극단적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일부 강성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오랫동안 대치할 게 불 보듯 뻔하다. 벌써부터 22대 국회가 최악의 국회가 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와 경제 위기 상황이 녹록지 않다. 해외에선 국내 정치 분열로 인한 한국경제 기적의 종언과 인구절벽에 따른 국가소멸을 우려하는 시선을 보내는 터라 답답하기만 하다.
경제난과 민생고는 뒷전인 거대 양당의 극한 대립과 군소정당이 끼어들 틈이 없는 정치 양극화. 현행 소선거구제가 낳은 거대 정당제의 심각한 폐단이다. 소선거구제는 풍부한 인재풀과 자금력으로 당선자를 대거 배출할 수 있는 여당과 제1야당에 유리하다. 특히 이번 총선이 증명하듯 적은 득표 차이로도 큰 의석 차가 생길 수 있어 문제다. 부산의 경우 민주당은 18개 지역구에서 45%대를 득표하고도 1석만 건졌다. 이처럼 특정 권역에서 지역구 1위가 많이 나온 정당이 의석을 싹쓸이할 수 있어 특정 지역의 일당 지배체제를 초래하기 일쑤다.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보면 유권자들이 여당에 탄핵·개헌 저지선인 100석가량을 보장한 건 여야의 협치 노력을 바라는 뜻이 담겨 있지 싶다. 야당은 기고만장하지 말고 여권은 겸허한 자세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 삶을 잘 챙기는 데 머리를 맞대라는 명령이다. 민주당은 무리한 입법 폭주를 멈추고 지역균형발전을 촉진할 산업은행 부산 이전을 위한 산은법 개정안과 밀린 민생법안들부터 시급히 처리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여야는 협치와 정치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소선거구제 개편을 적극 검토할 일이다.
2024-04-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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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노년 유권자의 냉철한 판단이 절실한 이유
제22대 총선이 27일로 사전투표까지 불과 9일, 본투표까진 14일 남았다. 28일부터는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4·10 총선 후보는 전국 254개 지역구에 699명이 등록해 2.8 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 각 당의 득표율과 자체 순번에 따라 정해지는 46개 의석을 놓고 경쟁하는 비례대표 후보의 경우 38개 정당에서 모두 253명을 추천해 평균 경쟁률이 5.5 대 1에 이른다.
이들 중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은 후보가 꽤 많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역구 후보 가운데 무려 34.6%가 전과자라는 것이다. 음주운전, 사기, 횡령, 상습 체불 등 죄질이 나쁘거나 다수의 전과가 있는 후보가 적지 않아 충격적이다. 비례대표 후보도 25%가량은 전과자다. 이들이 공당의 면죄부를 받아 출마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여야가 당초 국민의 정치 불신을 의식해 인적 쇄신을 통한 정치 혁신을 꾀하는 등 시스템 공천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탓이다. 막말을 일삼거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철저한 검증 없이 경선 기회를 주고 공천까지 했다. 결격 사유가 드러나 민심이 나빠진 뒤에야 마지못해 공천을 취소한 일도 있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인물 됨됨이와 경쟁력보다는 각각 친윤(친윤석열)·친명(친이재명)계 후보 공천에 열을 올리면서 부실 검증이 빚어진 결과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처사다.
이제는 유권자의 시간이다. 여야 후보들을 면밀하게 살펴 냉철한 판단으로 옥석을 가리는 게 유권자들의 몫이다.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 부적격 후보를 걸러내고 참된 일꾼을 국회로 보내야 마땅하다. 이를 위해 전체 유권자의 31.4%를 차지하는 60세 이상 노년층 유권자의 역할과 사명감이 특히 중요하다. 이번 총선의 노년 유권자 비중이 인구 감소와 고령화 현상 속에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며 18~19세와 20·30대를 합친 유권자 비율 31.2%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총선의 향방이 60대 이상 연령층의 투표 상황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역대 각종 선거에서 통상 노인층 투표율이 젊은 층에 비해 훨씬 높았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노년층의 한 표 한 표가 매우 중요해졌다. 노년층에게 여느 선거 때보다 신중한 판단과 올바른 선택이 요구되는 이유다.
노년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을 기해 안정된 노후를 위한 일자리 확대, 각종 지원금 증액 등 다양한 복지책을 여야에 요구하고 있다. 내년에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1000만 명)를 넘어설 전망인 초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년층이 노인복지 정책과 공약에 관심이 큰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노인층의 45.6%가 빈곤한 데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빈곤율이 상승한다는 최근 보건복지부 발표가 나온 터다. 한국 노인 빈곤율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상위권이며 극단적 선택과 고독사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바다. 따라서 노인복지 정책과 공약에 대한 허실을 잘 따져보는 게 바람직하다. 여야와 후보들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이 한층 커진 노년층 표심을 노려 실행이 어렵고 나라 곳간 사정을 무시한 사탕발림식 대책을 무분별하게 쏟아낼 공산이 커서다. 노년층 구미에 맞더라도 꼼꼼히 검토해 선심성·포퓰리즘 공약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 노년 유권자들이 현명하고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고물가·고금리에다 저성장 장기화, 청년 취업난, 세대 갈등, 저출생 등으로 온 국민의 삶이 힘들고 국가 존립마저 위태로운 시기다. 노인 권익만 챙겨선 어르신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각 당과 후보들이 다른 연령층과 현안 해결을 위한 공약도 제시하고 지역과 국가 발전의 비전을 갖고 있는지도 점검해 투표에 반영해야만 어른답다고 할 수 있겠다.
진영논리를 앞세운 여야가 “정권 심판” “제1야당 타도”를 외치는 정치 바람에 동조하거나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친소관계에 빠져 ‘묻지마’ 투표를 한다면 고착화한 거대 양당제의 폐해를 줄일 방도가 없다는 사실도 명심할 일이다. 앞으로 친윤·친명계와 부적격자가 대거 당선된다면 21대 국회보다 격렬한 정쟁은 불 보듯 뻔하다. 여야가 민생고와 경제난은 안중에도 없이 당리당략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극심한 대립과 충돌을 지속하며 일하지 않는 행태가 심해질까 우려된다.
노년 유권자들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경험과 연륜에 걸맞은 판단을 내릴 때가 이번 총선이다. 후보들의 자질과 능력을 유심히 보고 인물 본위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수많은 특권을 누리며 군림하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민의를 잘 대변하고 지역 발전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성실한 일꾼을 뽑아야 한다. 여기에 노년층이 귀감을 보여야 한다. 정치권이 유권자를 진정 두려워하는 풍토와 일하는 국회를 만드는 길이다. 이게 정치 개혁일 테다.
2024-03-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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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출산 가정에 대통령 축전과 선물을
“대통령은 신생아와 산모에게 축전과 선물을 보내라.” 이는 칼럼 끝부분에서 강조하려는 결론이다. 서론을 시작하기 앞서 글의 형식을 파괴하며 이 같은 주장을 맨 먼저 꺼낸 까닭은 긴 내용을 꼼꼼하게 읽을 생각이나 여유가 없는 독자를 배려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요즘은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릴스 같은 짧은 SNS 숏폼 콘텐츠가 대세다. 그러므로 축전과 선물 얘기를 언급한 첫 문장만 보고도 의도를 알아챈 사람은 이 칼럼을 계속 읽지 않아도 괜찮다.
지난 1일 부산 기장군 모 동네의원. 배가 아파 이곳에 내원한 임신부가 갑자기 출산하면서 다급한 사태가 벌어졌다. 29주 만에 태어난 아기가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의원에선 손쓸 방도가 없어 큰 병원으로 신속히 옮겨야 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급대는 이송 과정에서 울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조산아의 숨이 끊어지지 않게 응급 처치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또 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빨리 찾으려고 소방 당국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경남 양산부산대병원에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간 날은 공휴일이자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계획에 반발한 전국 대형병원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집단행동에 들어간 지 10일째였다. 곳곳에서 입원과 수술, 진료가 거부되거나 연기돼 의료대란을 빚고 있었다. 이 와중에 발 빠르고 침착한 대처로 제 역할을 다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조산아를 구한 소방과 구급대원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박수받아야 할 이는 또 있다. 이번에 위태로운 상태로 세상에 나와 현재 병원 인큐베이터에서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신생아와 분만의 고통을 무릅쓰고 자식을 낳느라 수고한 애엄마가 바로 그들이다. 모두 축하받아 마땅하다. 수도권이든 비수도권이든 출산율이 급락해 국가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소중한 새 생명의 탄생은 한 가정은 물론 그 동네와 지역의 큰 기쁨이요, 나라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갓난아이는 국가적인 축복이 필요한 존재라고 하겠다. 출산 통증을 참아내고 경사를 만든 산모의 위대함에도 사회의 칭송이 자자해야 하는 건 당연할 테다.
한데, 지금까지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여성가족부 소속 고위 공직자는커녕 실무자가 출산 가정을 찾아 축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신생아 혹은 산모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을 리도 만무하다. 기껏해야 급격한 인구 감소 탓에 지역소멸 위기감에 전전긍긍하는 농촌에서 읍·면 공무원이나 마을 주민이 가끔 아기가 출생하면 조촐한 축하 이벤트를 마련하는 게 고작이다.
국가 재앙과 다를 바 없는 초저출생 현상에도 불구하고 일반 신생아와 산모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너무나 소홀하다. 이러니 기성세대보다 경제적으로 팍팍한 삶에 허덕이는 청년층이 어찌 애를 낳겠단 마음을 가지겠는가. 더구나 저소득층 젊은이들에게 2세 계획은 언감생심이다. ‘유전유자녀, 무전무자녀’란 신조어가 회자할 정도다.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은 데다 엄청난 산고가 겁나 아예 일찌감치 출산을 접었다는 부부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인구절벽’이 닥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대적인 분위기 전환이 절실하다. 출산은 정부와 국민이 축복해야 할 국가의 경사이며 가문의 영광이라는 변화된 인식을 심고 확산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출산 장려의 절박함을 뼈저리게 느껴 직접 나서야 할 때다. 대규모 국제대회 등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의 긍지를 드높인 스포츠 선수와 문화예술인에게 대통령 명의로 축전이 날아간다. 앞으로는 대통령이 출생아와 산모 한 명 한 명에게 의미를 부여한 축전을 보내도록 하자. “고생했다” “잘했다” “고맙다” “축하한다”는 최고 지도자 말은 출산의 기쁨을 배가하고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출산 부부는 살맛이 나 활력이 샘솟을 것이 분명하다. 축전은 아이가 건강하고 올바르게 자라는 데 동기 부여가 되지 싶다. 이를 위해 행정 당국과 산부인과를 둔 병의원이 연계할 경우 원활한 아동 관리와 함께 아동 학대·유기 방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대통령이 명절마다 각계각층 일부에 지역 특산물 위주로 전달하고 있는 선물을 출산 가정에도 적용할 일이다. 꽃다발, 대통령 기념 시계, 건강식품, 육아용품을 곁들이면 더욱 좋겠다. 명절 선물을 받는 대상 중에는 여권 지지자와 중산층 이상이 많아 다수 국민의 위화감과 소외감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이 부분을 개선해 출산이 있을 때마다 선물을 안긴다면 국민 통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출산 가정을 위한 축전과 선물에 공을 들여 봄직하다. 이를 계기로 백약이 무효하고 겉치레가 많은 저출생 대응 정책이 출산 친화 기조를 조성하는 실효성 높은 대책들로 바뀌어 최악의 합계출산율을 끌어올리기를 바란다.
2024-03-0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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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상전 아닌 성실한 머슴을 뽑자
봄기운을 타고 선거철이 찾아왔다. 22대 총선을 50여 일 앞두고 여야의 표심 잡기와 예비후보들 간 공천 경쟁이 치열하다. 이와 달리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권을 바라보는 국민 대부분의 시선은 싸늘하다. 저성장과 고물가·고금리에 시달리는 서민들 가슴속에 정치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득해서다. 설 연휴 기간 전국 표밭 갈이에 나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이 같은 민심을 확연히 느꼈을 게 분명하다. 이는 양당이 연휴가 끝나자 앞다퉈 민생을 강조한 논평을 내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당에 희망을 기대하기는 힘들지 싶다. 민생이 어렵고 국민 불만이 커진 데 대해 뼈저린 반성보다는 상대당 탓만 해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로 당당한 태도로 “정권 심판”과 “거대 야당 타도”를 외친다. 거대 양당이 지난 4년간 경제 위기와 민생고를 외면한 채 당리당략을 최우선한 정쟁의 늪에 빠진 모습은 여전하다. 총선 과정에서는 승리에 집착한 나머지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더욱 극심하게 대립할지 모른다.
21대 국회를 돌이켜보면 최악 수준이라 평가할 수 있다. 민주당은 절대다수 의석을 믿고 자기 당에 유리한 입법 독주를 일삼은 데다 이재명 대표 방탄에 혈안이 됐다. 국민의힘은 야권을 설득해 협치를 이끌어내는 정치력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냈다. ‘무능한 여당’ ‘마피아 같은 제1야당’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 때문에 국회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되레 이념의 양극화와 국론 분열을 조장했다. 결국 국정은 정치 실종에 발목이 잡혀 차질을 빚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됐다. 정치 불신과 혐오가 증폭하고 일각에서 국회 무용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개개인도 자질적인 문제가 많다. 현역 의원은 임기 초 국회에서 국민 앞에 선서를 한다. 헌법을 준수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양심에 따라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겠단 다짐이다. 그런데 이 선서에 충실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소속당 지도부 눈치를 보지 않고 당론에 휘둘리지 않으며 국민 이익을 좇아 열심히 일하는 소신 정치인이 매우 드문 게 엄연한 현실이다. 21대 국회에서 처리하지 못한 민생 법안이 숱해 법안 가결률이 역대 최저인 5.6%에 불과하고 전체 의원의 공약 이행률이 51.8%에 그친 원인이 여기에 있다. 부산 국회의원들의 공약 이행률은 더 낮은 45.2%라 개탄스럽다.
4·10 총선에서 선출될 22대 선량들이 정쟁에 매몰돼 본연의 임무에 소홀한 21대 행태를 답습하는 건 정말 곤란하다. 무위도식하며 불체포·면책 특권 등 180여 가지 혜택은 찾아서 누리는 상당수 국회의원이 어김없이 챙겨가는 거액의 세비가 너무나 아깝다. 비위나 범죄에 연루돼 피고인 신분으로 수사·재판을 받는 의원도 수십 명에 달한다. 그러면서도 서울에서든 지역구에서든 귀빈 예우를 요구하거나 받으며 상전 노릇하기가 다반사다. 이들에게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유효한 것은 선거철뿐일 테다. 한 표가 아쉬워 머슴을 자처하며 허리를 과할 정도로 굽히고 사탕발림 공약을 남발하다 정작 국회에 입성하면 태도를 바꿔 목에 힘주고 나 몰라라 하기 일쑤다.
이같이 몰염치하고 반개혁적인 인사는 거대 양당의 총선 예비후보 가운데 많이 보인다. 양당 내 계파 갈등으로 이합집산하는 신당 추진 세력에서도 눈에 띈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인적 쇄신이 이뤄지지 않은 까닭이다. 각 당 전략 공천자 중엔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도나 연고 없이 지명도와 스펙만 앞세운 이들도 있다. 유권자들이 냉철하지 못하면 국민보다 정당 이익을, 공익보다 사익을 챙길 우려가 있고 득표 기술도 능란한 출마자에게 속아 넘어갈 공산이 크다. 그랬다간 볼썽사납고 국력을 낭비한 21대 국회 꼴이 나기 십상이다.
지금은 과도한 집중으로 폐해가 심각한 수도권과 인구 급감과 경제 쇠퇴로 소멸 위기에 처한 비수도권의 공멸을 막기 위한 지역균형발전이 절실하다. 다 함께 잘 사는 지방시대를 실효적으로 열 만한 참일꾼이 대거 필요하다. 따라서 유권자들의 판단 기준은 정당과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인물이 돼야 한다. 제대로 된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지역발전에 매진할 후보를 뽑아야 한다는 뜻이다. 권력과 서울 대신 지역을 쳐다보고 지역민을 위해 헌신하면서 민의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는 이를 선택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역량 있는 소수정당 출신도 국회 진출이 가능해 거대 양당 체제의 정치 양극화 폐단을 줄일 수 있다. 이번 총선은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정치 개혁을 이룰 기회다. 성실한 공복 발굴을 위해 현명하고 꼼꼼한 주권 행사가 요구된다. 안 그러면 당선자를 받드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2024-02-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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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한국해양대 총장 공석, 교육·해수부 뭣하나
한국해양대는 1945년 부산에서 ‘해양입국’을 기치로 내걸고 개교했다. 이후 79년 역사를 통해 해양 분야 전문 인력을 숱하게 양성하며 해양 특성화 종합대로 발전했다. 이 국립대는 한국경제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한 해기사의 요람이다. 그간 선장과 기관사 등 1만여 명의 고급 해기 인력을 배출했다. 해기사들은 우리나라가 수출로 먹고살면서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토대 역할을 한 해운산업의 역군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1960~90년대 해외에서 선원으로 취업해 벌어들인 82억 6178만여 달러의 막대한 외화는 국가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다음 달로 우리 선원이 해외 취업에 나선 지 60주년이 돼 한국해대가 생긴 의미를 더한다.
한국해대는 몇 해 전 ‘세계 최고 수준의 글로벌 해양 특성화 종합대 도약’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때부터 세계 해양의 미래를 선도하는 글로벌 대학의 꿈을 키우며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이 대학 발전의 시곗바늘은 지난해 11월 7일을 기해 멈춰 서버렸다. 이날 제8대 도덕희 총장의 4년 임기가 끝난 뒤 3개월 가까이 총장 자리가 공석이어서다. 앞서 7월 20일 제9대 총장 임용후보자 선거에서 1, 2순위를 차지한 두 교수가 교육부에 추천됐다. 그런데도 반년이 넘도록 정부의 후임 총장 임명이 이뤄지지 않은 채 감감무소식이다.
국립대 총장이 어떤 자리인가. 학생 지도, 교무 처리, 소속 공무원 지휘감독 등 학내 제반 업무를 통할하고 전반적인 대학 정책을 결정한다. 학교를 대표하는 대외적 활동도 많은 기관장직이다. 그 중요성 때문에 교육부 장관의 임용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장관급 대우를 한다.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가진 수장을 잃은 한국해대가 자칫 난파선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현재 모습은 배가 선장도 없이 방향을 잃고 망망대해를 떠도는 꼴이다. 실제로 대학 총장이 공석인 탓에 일부에서 행정 공백을 빚는 데다 미래와 직결된 현안에 속수무책이다.
국립 부경대가 최근 한국해대에 여러 번 제안한 대학 통합이 대표적이다. 의사 결정권을 쥔 총장이 없어 대학 간 협의는커녕 내부 논의나 의견 수렴도 힘든 실정이다. 부경대 요구는 전국 대부분 대학이 사활을 걸고 있는 정부 글로컬대학 육성사업에 선정돼 5년간 1000억 원을 지원받자는 것으로, 묵살해도 될 사안이 아니다. 오는 8월 선정을 앞두고 적극 검토할 만하다. 융복합 시대에 한국해대와 수산기술에 특화한 부경대가 통합 혁신안으로 글로컬대로 지정돼 세계 최고 해양과학 종합대로 거듭나자는 게다. 올 들어 인천시가 해양대·해양수산대 설립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인 추진에 나섰다. 이 문제 역시 한국해대로선 총장이 없어 판단과 대응이 어렵다. 반면 인천의 움직임은 가뜩이나 수도권 일극체제로 전국 인재들이 수도권 대학으로 몰리는 판국에서 한국해대의 존립을 위협하는 대형 악재가 아닐 수 없다.
한국해대 총장의 부재는 비슷한 시기에 총장 선거를 치른 서울과학기술대와 서울교대 두 국립대 총장이 지난달 28일 임명된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해대는 서울 밖 ‘지잡대’로 취급하며 나 몰라라 해도 상관없는 교육기관이 아니다. 교육부는 총장 임용후보자가 결격 사유가 있다면 더는 침묵하지 말고 정확한 이유를 밝혀야 옳다. 일언반구조차 없이 계속 방치하는 건 대학의 파행을 조장하고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처사다. 직무유기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현 정부가 지방시대를 선포하며 지역·대학의 동반 성장을 위해 도입한 교육발전특구 제도에 역행하는 행태다. 정부의 대학 길들이기나 줄 세우기라는 의혹까지 살 수 있는 대목이다.
해양수산부도 교육부 문제로 치부해 외면해선 안 될 일이다. 정부의 ‘신해양강국’ 정책 실현에 한국해대의 경쟁력 강화와 참여는 필수적이다. 길어지는 총장 공석에 따른 어려움에 대해 해수부의 위기의식이 요구된다. 교육부와 대통령에게 한국해대의 중요성과 가치를 충분히 인식시켜 신속히 정상화해야 마땅하다. 한국해대는 2019년에도 교육부의 총장 1순위 후보 임용 제청 거부로 총장 공백사태를 빚었다. 교육부의 느긋함과는 달리 한국해대는 여러 업무 차질로 피가 마른다. 이를 지켜보는 대학 동문과 지역사회, 해양업계는 속이 갑갑하기만 하다. 이러니 해수부와 대통령실을 연결할 해양수산 전담 비서관이 필요하다는 업계 목소리가 줄기차게 나오는 것 아닌가.
교육부 장관과 해수부 장관은 뭣하고 있는가. 하루빨리 한국해대 총장을 임명하든지 아니면 재선거를 요청하든지, 정부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시급하다. 총장 공석이 더 장기화할 경우 장관의 사명감과 존재 이유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교육에 대한 애정이 없고 해양수산을 무시하며 부산을 홀대한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2024-01-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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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부산항만공사 독립은 요원한가
부경대는 매년 말 한국인의 바다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조사·분석한 ‘부경해양지수’를 발표한다. 전국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지난 연말 내놓은 해양지수의 한 항목에선 부산항이 2022년에 이어 한국 대표 항구로 꼽혔다고 한다. 올해로 개항 148주년을 맞은 부산항이 국내 전체 수출입 화물의 76%, 컨테이너 물동량의 90%가량을 담당한 최대 무역항인 점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다.
부산항을 관리·운영하는 기관은 2004년 1월 16일 출범한 부산항만공사(BPA)다. BPA가 지난달 선정한 ‘부산항 10대 뉴스’ 중 첫 번째를 장식한 게 ‘사상 최대 물동량’이다. 지난해 부산항에서 처리된 컨테이너 물량은 전년보다 3.1% 증가한 2275만TEU(1TEU는 6m짜리 컨테이너 1개). 개항 이래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란 반가운 소식이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같은 대형 악재를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과라고 하겠다.
이 같은 호실적에도 불구하고 부산항은 위태롭다. 중국 주요 항만이 지난해 부산항이 힘겹게 지킨 세계 7위 컨테이너항 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경제 패권을 다투는 G2 국가로 떠오른 중국의 항만들이 대규모 개발사업에 나서고 물동량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서다. 부산항은 BPA 창립을 전후한 시기에 컨테이너 물동량 기준 세계 3위였지만, 그동안 중국 항만들의 가파른 성장세에 밀려 순위가 점차 떨어지는 처지다. 부산항이 일본과 중국, 미국·유럽 간을 바닷길로 연결해 주는 입지적 장점과 BPA의 환적화물 유치 노력에 힘입어 싱가포르항에 이어 세계 2위 환적항을 유지하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부산항 항만 순위가 하락하는 원인의 하나를 BPA 경쟁력이 경쟁국들 항만공사에 비해 낮은 데서 찾을 수 있다. BPA는 항만 투자와 사업 추진에 제약이 많다. 항만업무는 해양수산부, 경영관리는 기획재정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공기업으로 운영된 까닭이다. 반면 싱가포르항만공사(PSA)는 1997년 항만당국을 민영화한 개혁을 통해 설립돼 항만 개발·관리·운영에 자율적 결정권을 갖고 글로벌 항만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는 싱가포르가 오래전 부가가치 창출 규모가 엄청난 세계 1위 항만에 등극하고 항만·물류 대국으로 도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싱가포르가 근래 1인당 국민소득 6만 5000달러에 이르는 강소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다.
부산항과 싱가포르항의 격차가 커진 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이 BPA의 발목을 잡은 탓이다. 이 법에 따라 정부의 심한 간섭과 규제가 이뤄지면서 항만업무의 자율성·전문성·효율성을 높여 부산항을 경쟁력 있는 글로벌 해운·물류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BPA 설립 취지는 빛이 바래고 있는 셈이다. 결국 BPA는 직접적인 부두 운영은커녕 항만 관리만 하는 부두임대사업자 역할에 그치고 있다. BPA 사장과 본부장(부사장급) 직책은 해수부 고위직 출신의 ‘낙하산 인사’ 논란도 잦았다.
이 때문에 BPA의 자율권과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지역사회의 목소리가 빗발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방공사화, 항만자치권 이양, 임원 인사권 보장 등의 요구는 묵살되기 일쑤여서 BPA 독립은 기약이 없다. 지난해 BPA가 공기업에서 정부의 관리감독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한 기타공공기관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 고작이다. 여전히 BPA는 기재부에 예타를 신청해 승인받아야 하는 한계가 있다. 중요 업무의 하나인 항만 개발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이러니 ‘악조건에도 적극적인 BPA’라는 평가와 ‘공무원보다 경직된 조직’이란 지적이 엇갈린다.
BPA가 실질적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부산항을 세계 굴지의 메가 허브항으로 제대로 키우려면 독립성 강화가 필수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BPA의 해수부 출신 역대 사장 대부분도 자율성 확대를 원했을 정도다. 지금처럼 해수부가 주도하는 항만정책 수립과 개발 과정에서 BPA가 소외되고 부산이 배제된다면 윤석열 정부가 선포한 지방시대에 맞춘 부산시 발전계획과 지역 특성에 잘 어우러지는 부산항을 조성하긴 어렵지 싶다.
부산항이 기로에 서 있다. 2040년까지 14조 원을 들여 21개 선석의 스마트 항만을 만드는 부산항 제2 신항(진해신항) 건설사업이 올해 착공한다. 이를 앞두고 경남에선 부산경남항만공사나 별도의 경남항만공사를 설립하자는 주장이 강하다. 부산항 북항, 신항, 진해신항의 시너지 극대화를 위해 통합 관리가 필요한 마당에 분열 조짐이 인다. 창립 20주년이 된 BPA가 글로벌 선진 항만들을 따라잡는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정부는 힘을 실어 줄 일이다. 윤 대통령이 추진을 약속한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 역시 가덕신공항과 인접한 부산신항의 활성화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다.
2024-01-1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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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암울한 계묘년, 희망찬 갑진년
2023년 계묘년이 저문다. 돌이켜보면 ‘토끼의 해’답게 부산시와 온 시민이 여느 해보다 열심히 달렸던 해로 평가할 수 있겠다. 일자리 50만 개 창출과 61조 원의 경제 유발 효과가 기대된다는 2030월드엑스포를 부산에 유치하려고 열정적으로 뛰었던 게다. 부산이 엑스포를 통해 글로벌 도시로 도약하면서 지방소멸에 마침표를 찍고 균형발전의 지방시대를 여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바람과 달리 지난달 29일 받아든 것은 경쟁 상대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119 대 29라는 큰 표차로 진 성적표다.
엑스포 유치운동 과정에서 전 세계에 부산을 알려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인 정부와 부산시의 노력은 높이 산다. 하지만 백중세라며 유치전 판세 분석에 실패해 허망한 결과를 낳은 잘못을 질타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뼈아픈 참패에 사과한 뒤 이달 6일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엑스포 유치에 애쓴 만큼 유치 불발에 따른 실망감이 큰 시민을 달랠 목적에서다.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은 수도권 일극체제에 대응할 남부권 거점도시를 키워 지역균형발전을 꾀한다는 구상이다.
이후 글로벌 허브도시 얘기가 들릴 때마다 지난해 10월 부산·울산·경남 특별연합(메가시티)의 좌초에 대한 서운함을 느낀다. 부울경 메가시티 추진 이유 역시 수도권 일극화의 폐해를 극복하고 국토균형발전을 촉진하는 남부지역 초광역 경제권 형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을 받으며 잘 진행되던 메가시티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진 경남도지사와 울산시장, 강한 추진 의지를 보이지 않은 부산시장 등 국민의힘 소속 세 광역단체장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반면 국민의힘 중앙당은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수많은 서울 유권자를 의식해 서울이 더 팽창하는 ‘메가시티 서울’을 밀어붙이고 있다. 부울경 메가시티가 더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부산엑스포와 부울경 메가시티. 위기에 처한 지 오래인 부산경제는 지역 발전과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한 굵직한 두 사안이 물 건너가면서 끝을 모른 채 추락하는 모양새다. 조금이나마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부산은 지속적으로 침체해 수도권의 대항마는커녕 지역 생산성, 취업률 등 각종 경제지표 대부분이 언제나 전국 꼴찌 수준일 정도로 암울하다.
부산상의가 1만 5515개 지역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해 26일 내놓은 ‘산업 활력도 분석 결과’는 활기 잃은 지역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부산 기업의 경영·영업·고용 부문 활력이 2016년 이후 꾸준히 하락세를 보인단다. 주력 산업인 제조업의 활력 수치마저 최저 상태라 여간 심각하지 않다. 부산에 대기업이 적은 데다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이뤄지지 못한 까닭일 테다. 대기업과 벤처기업이 집중된 수도권과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만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돌파구 마련이 절실하다.
부산이 경기에 민감한 자영업과 서비스 업종 비중이 매우 높은 경제구조도 오랜 저성장과 내수 부진에 휘둘리며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든 원인이다. 소비 위축과 고금리·고물가에 시달리다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증가하는 가운데 대출 갚으려 힘겹게 버틴다는 소상공인의 한숨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결국 비용 절감을 위해 종업원을 내보낸 1인 자영업자가 속출하는 게 부산의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부산의 경제력을 나타내는 1인당 GRDP(지역내총생산)는 3161만 원으로 17개 시도 중 14위에 불과하다. 서울 5161만 원, 전국 평균 4195만 원에 한참 뒤처진다.
그렇다고 한탄하거나 체념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엑스포 유치전에서 추구했던 ‘부산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먼저 윤 대통령이 글로벌 허브도시 추진을 뒷받침하기 위해 함께 약속한 관련 특별법이 2024년에 하루빨리 제정돼야 한다. 그리고 박형준 부산시장이 같은 맥락에서 부산을 싱가포르 같은 국제자유도시로 만들어 사람과 기업, 자금이 다 몰리도록 하겠다고 밝힌 포부를 구체화해야 한다. 정부와 부산시가 적극 머리를 맞대 세부적이고 실효적인 방안을 마련해 실천함으로써 공염불이 되지 않게 할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 성장과 도약의 활로를 찾고 희망을 키우기 위해 새판을 짜는 부산시의 자구책이다. 박 시장은 그간 엑스포에 쏟은 모든 힘을 앞으론 시정 구호인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행복도시 부산’을 현실화하는 데 집중할 때다. 청년·고령층에 맞는 양질의 일자리 확보, 고부가가치 신산업 육성, 산업구조 개편, 민생 안정, 정주환경 개선 등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진한 기존 시책을 재점검하고 새로운 발전 과제를 발굴해 도시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마땅하다. 희망찬 새해 갑진년 ‘청룡의 해’엔 부산이 반드시 용처럼 비상하기를 바란다.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
2023-12-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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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지방 중심주의가 필요하다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다. 출연자들은 서울 토박이든 지방 출신이든 예사로 이렇게 표현한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공통적인 언어 습관인 만큼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비수도권 지역 사람의 일상 대화 역시 TV 화면 속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명색이 국내 제2 대도시이자 글로벌 해양·관광 도시인 부산 시민조차 “서울 올라간다”거나 “부산 내려온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같은 관용어 사용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2년 뒤 한양, 지금의 서울을 도읍지로 정한 이후부터 이곳에서 펼쳐진 중앙집권적 통치가 낳은 말버릇이다. 600여 년간 서울을 우러러본 가치관이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격언이 숭상될 정도로 숙명적인 민족 유전자로 체화된 까닭일 테다.
한국학의 거장으로 꼽힌 고 김열규(1932~2013) 서강대 명예교수는 사회에 만연한 ‘상경하향’(上京下鄕) 관념을 질타한 바 있다. 왕조시대도 아닌데, 지역민까지 서울만 높은 중심지로 생각해 고약한 지역 차별성을 보인다는 게다. 자신이 살아가는 고장과 부모가 계신 고향을 낮은 변방이 아니라 서울보다 높은 곳, 중심으로 여기는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서울 간다” “부산 간다” “부모님 댁에 올라간다”고 말하며 서울 위주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주문이었다.
그럼에도 서울 중심주의는 완화되기는커녕 인근 인천과 경기를 포함한 수도권 제일주의로 확산해 이 지역 일극체제를 가속화해 왔다. 2020년을 기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 땅에 살기 시작해 매년 그 비중이 증가 추세임을 보여주는 통계는 수도권 일극화의 단적인 예다. 이를 부추기는 과도한 수도권 집중화는 지난해 매출 기준 국내 1000대 기업 중 수도권 업체가 75%인 749개사에 달하는 데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 상장기업의 72%, 근로자와 벤처기업의 각각 6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편중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수도권이 경제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의료 등 전 분야에 걸쳐 모든 걸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비대해지는 과정에서 지방 멸시 풍조까지 생겨나 문제다. 오죽하면 경기도 농촌 주민마저 부산을 ‘촌’으로 취급할까. 수도권 사람이 더욱 열악한 지방 중소도시를 여행할 때 교통·편의 시설이 엉망이라고 불평하기 일쑤란다. 그래놓고도 정작 비수도권의 인프라 구축과 정주환경 개선을 위한 정부 지원을 촉구하는 호소를 외면하는 일이 흔하다. 심지어 “시골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싸늘하게 군다. 정말로 뇌꼴스럽고 이율배반적인 태도다.
비수도권은 수도권 중심주의와 수도권 일극체제가 공고해질수록 황폐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역 경기 침체로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는 청년층 유출과 인구 감소 탓에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가파른 인구 고령화 때문에 노동력을 외국인 노동자에 의존하지 않으면 경제를 지탱하기 힘든 농어촌의 경우 공동화가 심해 소멸 위기에 빠진 곳이 속출하는 실정이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둔, 현행 인구수 기준 소선거구 제도도 벼랑 끝에 내몰린 비수도권의 암담한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수도권에는 1개 기초자치시가 인구 폭증에 힘입어 2~4개 선거구로 나뉜 데가 많다. 반면 비수도권은 인구가 급감하는 바람에 지역 정서와 특성이 다른 3~6개 시·군이 1개 선거구로 묶여 서울보다 훨씬 넓은 곳이 늘어나는 추세다. 당선자의 출신지가 아닌 다른 시·군 주민은 대변자가 없어 더더욱 소외된다는 불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심화는 역사의 후퇴와 사회 분열을 부르는 수도권·지방 간 갈등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한때 사회문제가 된 영호남 갈등이 옅어진 대신 수도권·지방 간 지역갈등이 깊어지는 형국이라 해소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더욱이 수도권·비수도권 간 불균형 현상은 국가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인구 절벽’의 주범이다. 아이 낳을 젊은 층이 태부족한 게 비수도권의 엄연한 현실이다. 수도권에는 취업난과 부담스러운 집값, 고물가에 짓눌려 연애·결혼·출산에 엄두를 못 내는 3포세대가 숱하다. 이들 중 취직, 내 집 마련, 취미, 희망, 인간관계 등 더 많은 것을 포기하는 N포세대가 늘고 있다. 지난해 기준 한국 합계출산율이 0.78명, 서울 0.59명에 불과해 국가소멸 위기론이 불거진 이유다.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수도권 과밀화의 폐해를 없애고 비수도권에 활기를 불어넣어 공멸을 피할 수 있는 지역균형발전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 인식에 지방 중심주의, 비수도권 우선주의가 요구된다. 진정한 지방시대를 열려면 재정분권 확립 등 실효적인 정책 마련과 적극적 실천이 중요해서다.
2023-12-1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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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욕본, 욕하는, 욕먹는 사람
“욕봤습니다.” ‘욕’(辱)이란 낱말이 들어 있는 이 말은 남을 헐뜯는 욕설이 결코 아니다. ‘수고했다’는 좋은 뜻을 가진 경상도 사투리 말투다. 힘든 일을 하느라 공을 들이고 애를 쓴 사람을 칭찬하거나 격려할 경우 많이 사용하는 경상도 말이다. 몹시 고생스러운 일을 겪은 이에게 위로를 건넬 때도 쓰는 표현이다. 그동안 2030부산월드엑스포(세계박람회) 유치 운동에 힘쓴 민관합동유치위원회 구성원의 등을 두드리고, 유치 열기를 뜨겁게 달군 부산 시민 어깨를 토닥이며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엑스포 유치위에 참여한 정관계와 재계 인사들은 지난 500여 일간 지구를 495바퀴나 돌 수 있는 1989만 1579km 거리를 누비면서 유치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비록 부산 유치엔 실패했지만, 민관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친 ‘K원팀’의 유치 활동 과정에서 이뤄낸 성과는 엄청나다. 잘사는 데다 첨단 기술력을 보유한 우리나라 국격과 위상을 지구촌 만방에 드높였다. 특히 180여 개국에서 해양·관광 도시 부산의 매력과 특장점을 널리 알려 도시 브랜드 인지도를 크게 높인 의미는 각별하다.
엑스포 유치전을 통해 해외에 새로 구축하고 넓힌 외교·경제 지평. 전 세계인에게 또렷하게 각인한 부산과 한국의 멋진 이미지. 이를 자산으로 잘 활용하고 부산 유치가 실패한 원인을 철저히 분석해 교훈으로 삼는다면 국운 상승과 부산 발전에 새로운 동력이 될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에 수고한 이들을 위해 큰 소리로 해 주는 말. “욕봤소, 욕봤심더, 욕봤심미데이, 욕봤어예!”
‘욕’이 부산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서 긍정적이고 정겹게도 쓰이는 것과 달리 일반적인 정체성은 부정적인 데 있다. 일상에서 통용되는 욕의 진정한 의미는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또는 ‘남을 저주하는 말’이어서다. 이게 국어사전이 풀이해 놓은 욕의 가장 보편적인 뜻이다. 욕은 남에게 상처를 주기 십상인 천박한 언어다. 함부로 입에 담거나 쉽게 내뱉으면 안 되는 금기어인 셈이다.
최고 지도층으로 꼽혀 온갖 예우 속에 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이 저급한 욕의 쓰임새가 많은 계층인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정치인이 남발하는 막말 속에 욕이 담겨 볼썽사나운 건 흔한 일이 된 지 오래다. 불과 몇 년만 살펴봐도 욕하는 바람에 생긴 설화는 열거하기 힘들 만큼 차고 넘친다. 요즘은 정치권에서 욕설을 방불케 하는 거칠고 속된 발언이 마구 오가는 정도가 심해졌다. 극심한 정쟁을 일삼는 여야 거대 양당 간에, 심지어 같은 정당 인사끼리도 잔인한 표현을 살천스레 주고받으며 마찰을 일으킨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쏘아댄 언행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 장관을 “어린놈” “건방진 놈” “미친놈”이라고 비하했다. 이어 최강욱 전 민주당 의원이 대통령 부인을 겨냥해 “암컷들이 설친다”고 한 언사는 여야 간 비방전에 불을 지핀 경우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은 영어로 자신을 업신여기는 듯하게 말한 이준석 전 대표를 향해 “도덕이 없는 건 부모 잘못이 크다”고 밝히며 남의 부모를 욕해 갈등을 빚었다.
이 같은 양상은 내년 4·10 총선이 다가오자 상대 당의 기선을 제압하거나 당내 입지 싸움에서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해졌기 때문일 테다. 더욱이 당 강경파를 중심으로 발언의 수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저마다 강성 지지층에 구애하는 동시에 상대와의 전선을 명확히 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앞으로 총선 기간에 공천 탈락 위기에 처하거나 유권자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정치인이 지지층을 의식해 험악한 막말에 더 기대는 악순환이 반복될 게 우려된다.
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아귀다툼, 이전투구, 목불인견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격렬한 정쟁에 말싸움질까지 더해 경제 살리기와 민생 안정에 뒷전인 정치권 행태는 우리 정치문화를 후퇴시키고 정치 불신과 혐오감을 키운다. 욕먹어도 싸다. 고물가·고금리에 신음하는 서민층이 여야와 국회에 대해 “그저 욕만 튀어나온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국민적 비난을 받으며 욕먹고 있는 국회의원. 이들에게 욕설과 막말을 삼가고 지위에 맞는 품격을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일까. 악담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져 소모적인 대치 정국을 이어가는 모양새는 여야 협치를 위해서라도 근절돼야 마땅하다. 반목과 분열을 조장하는 날선 언쟁은 정치개혁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부디 여야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도리부터 다하는 정치를 펼쳐 나가길 바란다. 정치권이 더 이상은 욕먹지 않고 ‘욕봤다’는 칭찬을 자주 듣게끔 노력할 일이다. 여야가 서로에게 욕봤다고 덕담하는 모습도 기대한다. 이러한 바람직한 광경은 국민 의식 수준도 높아져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
2023-11-3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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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지방시대 성공은 재정분권에 달렸다
이달 1~3일 대전에서 ‘대한민국 지방시대 엑스포’가 열리고 있다. 기존 균형발전박람회와 지방자치박람회를 합친 이 행사는 ‘이제는 지방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올 7월 10일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가 국가균형발전위와 지방자치분권위를 통합해 발족한 이후 처음 마련한 대규모 박람회다. 전국 17개 시도, 6개 중앙부처가 참여한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전시를 통해 지역균형발전과 지방자치의 비전 그리고 정책을 논의하면서 성공 사례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고 있다.
마침 정부가 지방시대 엑스포 첫째 날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을 살리겠다며 제1차 지방시대 종합계획을 발표해 의미를 더했다. 2023~2027년에 걸쳐 기업 유치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회발전특구,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려는 교육발전특구, 첨단 산업을 육성하고 정주 여건을 개선하는 도심융합·문화특구 등 4대 특구를 도입해 국토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을 촉진한다는 구상이어서다.
둘째 날에는 지방시대위 출범을 계기로 새롭게 제정한 제1회 ‘지방자치 및 균형발전의 날’(매년 10월 29일) 기념식도 거행됐다. 종전 ‘지방자치의 날’(10월 29일)과 ‘국가균형발전의 날’(1월 29일)을 한날로 통합한 법정 기념일이다. 이로써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에 대한 국민 관심이 커지고 윤석열 정부가 선언한 지방시대의 기대감이 고조되는 모양새다.
지방시대 엑스포의 잔치 분위기와 정부가 내놓은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최근 비수도권 광역지자체들은 초조하고 다급하기만 하다. 내년도 659조 원의 정부 예산안을 심의하는 예산 국회가 이달 들어 개막했기 때문이다. 지자체마다 한 달간의 예산 정국을 맞아 국비 확보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미 반영된 지역 주요 사업 예산이 깎이지 않게 잘 지키고 미반영 사업비를 따낼 수 있도록 국회 17개 상임위와 여야, 정부부처를 상대로 총력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다.
부산시의 경우 지난주부터 국비 확보 전담팀이 국회 인근에 상주해 국비 지원의 당위성을 알리는 활동 속에 전방위 대응에 골몰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는 예산 확보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경기 침체 탓에 사상 최대인 59조 원의 세수 결손이 생긴 정부가 긴축 재정을 표방하며 내년 예산안을 보수적으로 짠 게다. 더구나 같은 사유로 정부의 지방교부세 배정액이 줄고 부동산 거래 위축에 따라 지방세인 부동산취득세 수입마저 급감한 상태다. 재정에 빨간불이 켜진 부산으로선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는 물론 초광역경제동맹인 울산·경남과 연대한 대응전략이 절실히 요구된다.
각 시도가 절박한 맘으로 국회 예산안 처리에 촉각을 곤두세워 국비 확보에 목을 매는 건 연례행사다. 지방세수 부족이 전국 광역·기초지자체 재정자립도를 평균 45%에 그치게 하고 국비 의존도를 높인 결과다. 우리나라 세입구조는 국세와 지방세 비중이 7.5 대 2.5 수준이다. 전체 조세 중 지방세는 24.7%로 캐나다 55.1%, 독일 53.7%, 미국 46.5%, 일본 37.7% 등에 비해 매우 낮다. 지자체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예산 운용이 굉장히 힘든 이유다.
지방이 재정적으로 중앙에 예속화한 구조가 여전한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지방자치제 시행 30년이 지났지만, 망국적인 수도권 일극체제와 지방소멸 위기가 심화하고 실효적인 자치분권이 이뤄지지 않는 원인은 열악한 지방재정에 있다. 정부가 분권을 명목으로 지방에 이전하는 권한이 계속 늘고 있으나 정작 지역 살림과 업무 추진에 필요한 재원 충당 방안을 보장하지 않아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온 지 오래다. 이런 처지로는 진정한 지방시대의 실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지방시대위가 대통령의 지역 공약과 지방시대 국정과제를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로서 1차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지자체들의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정부가 정한 방침과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시도별 발전계획을 세우게 하는 바람에 지역 특성을 고려하거나 창의적이고 차별적인 사업을 반영할 여지가 없었다는 후문이다. 지방시대위가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면 지방의 편에서 균형발전을 전폭 지원하는 든든한 우군은커녕 지자체를 통제하고 간섭하는 중앙집권적 부처 하나가 추가되는 셈이다.
지방자치 취지에 걸맞게 지방주도형 균형발전을 앞당기려면 국세·지방세 비율을 6 대 4 정도까지 끌어올리고 지자체 재정자립도를 크게 높일 필요가 있다. 지방의 과세와 예산 편성권이 확대되게끔 세제를 정비하는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많은 실정이다. 이에 지방시대위가 앞장서 노력하는 것이 기구 신설 목적에 부합하는 길일 테다. 지방시대가 성공하는 근본적인 대책은 지방정부 재정력을 강화하는 재정분권 실시뿐이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11-0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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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위기의식으로 '골디락스'에 힘 모을 때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이달 20일 기준금리를 현 5.25~5.50%로 동결했다. 3.50%인 우리나라 기준금리와 간극이 커지지 않고 최대 2.00%포인트 차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행 역시 내달 12일 기준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미 간 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지 않아 국내 금리 인상을 압박하는 요인이 한동안 해소되기 때문이다. 고금리와 이자 부담에 시달리는 수많은 가계와 기업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미국 기준금리 동결은 올 들어 두 번째로, 지난 6월 이후 3개월 만이다. 지난해 3월부터 올 5월까지 10차례나 기준금리가 올라 200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 고공행진 추세가 한풀 꺾인 모양새다. 미 정부의 통화정책 긴축 기조로 연말께 금리가 다시 인상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이번 동결은 경제 여건의 개선에 따른 활황세를 반영한 결과로 풀이된다. 미 연준도 자국 경제에 대해 ‘견고한 경제 활동, 견조한 일자리 창출, 낮은 수준의 실업률’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실제로 미국 경제는 최근 글로벌 경기 둔화 속에서도 두드러진 호조세를 보인다. 경기가 식을 줄 모르고 호황을 이어 가자 취업이 급증해 실업률은 완전고용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고용지표의 안정세가 뚜렷하다. 물가 상승률도 크게 하락하고, 앞으로 상승폭이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됐다. 미 정부가 기울이는 경기 부양책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키운다.
미국 경제가 침체를 벗어나 ‘골디락스’(Goldilocks)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다소 성급한 분석마저 잇따른다. 골디락스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이상적인 경제 상황을 일컫는다. 영국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에 등장하는 금발 소녀의 이름에서 따온 경제용어다. 길을 잃어 숲속을 헤매던 골디락스는 우연히 만난 곰들이 끓여 준 세 가지 죽-뜨거운 것, 차가운 것, 미지근한 것 중 미지근한 죽으로 허기를 채우고 기뻐한다는 게 동화 속 얘기다. 이같이 경제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인플레이션 없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호황 상태가 골디락스다.
미국 경제에 엿보이는 ‘고성장·저물가’의 모습이 부럽다. 오랜 경기 둔화와 저성장으로 1%대 저성장의 고착화가 우려되는 우리 사정과 대조적이어서다. 정부가 예측한 2023년 한국 경제 성장률은 겨우 1.4%다. 이미 수출 부진과 중국 경제 둔화세 등의 영향으로 상반기 경제 성장률은 0.9%에 그쳤다. 이대로 가면 성장률이 정부 예측치보다 낮아질 수 있다. 이런 가운데 JP모건, HSBC 등 해외 8개 투자은행이 내놓은 내년도 우리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평균 1.9%에 불과하다. 성장률이 올해와 내년 2년 연속 1%대에 머무는 건 사상 처음이자 만성적인 ‘초저성장’의 늪에 빠진다는 의미라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좋은 일자리 창출과 고용 확대는 불가능에 가깝지 싶다.
민생과 직결된 물가도 진작에 비상이 걸렸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갈등 여파로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바람에 거의 모든 물건값과 음식비, 공공요금이 크게 올랐다. 정부가 고물가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으나 각종 가공식품 가격 인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더욱이 추석을 앞두고 제수용품과 식재료, 생필품 등 장바구니 물가가 폭등해 지갑이 얇은 서민층의 삶을 더욱 옥죈다. 체감 물가가 3%대인 소비자물가지수에 비해 월등히 높아 국민의 시름은 깊어지고 내수 진작이 힘들 수밖에 없다.
경제난의 그림자가 매우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도 경기 회복을 위한 정치권의 별다른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가계, 중소기업, 정부 모두 빚에 허덕일 만큼 경제 위기가 심각하지만,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위기의식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상대방을 향한 적개심에 가득 차 격렬한 정쟁과 감정적인 이념 전쟁에 매달리면서 국회를 공전시킨다. 나라꼴이 어찌되든 정치적 이득만 취하려는 투여서 경제와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한미 기준금리가 역전된 까닭에 국내 금리의 추가 인상 요인이 상존한 데다 또다시 국제 유가가 치솟아 국가 경제에 어려움이 가중되는 실정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야가 극심한 민생고를 방치한다는 거센 질타가 나오는 이유다. 이제라도 여야가 하루빨리 대화와 타협을 통해 실종된 정치를 복원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경제 위기를 외면할 경우 정당성과 공당 자격이 없어 퇴출돼야 마땅하다. 여야는 다가온 추석 민심을 제대로 읽어 경제 살리기와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최우선하고, 여기에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국 경제의 골디락스를 향해 합심하며 협치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09-2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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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권한만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는 사람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 헌법 제7조 1항 규정이다. 공무원이 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공복(公僕)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공무원 중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의원, 시도교육감 등 선출직은 주권을 가진 국민의 투표를 통해 뽑혀 공익을 위해 복무하는 만큼 공복의 성격이 더욱 짙다. 그래서 이 선량들 가운데 상당수는 선거 기간에 유권자에게 충실한 머슴을 자처하며 머리를 조아릴 정도다.
공무원이 국민을 섬기며 국가에 헌신하는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맡은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잘못한 점이 있으면 기꺼이 책임도 지는 자세가 그것이다. 이는 말단에서 최고위까지 전 공직자가 잘 숙지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공직윤리의 하나다. 그 책임의 정도는 부여된 권한, 직책, 지위에 따라 달라질 테다. 권한이 크고 많은 고위직, 요직일수록 감당하는 책임감의 무게는 커진다. 바로 세간에서 얘기하는 ‘공직의 무게’다. 공무원에겐 일반 직장인과 다른 투철한 사명감이 필요하며, 자리나 임무에 걸맞은 책임 의식이 요구된다는 게 사회의 통념이다. 국민이 낸 혈세로 충당한 국록(國祿)을 먹는 직업이 공무원인 까닭이다.
작금의 공직사회 현실은 국민 기대치와 달라 문제다. 공무원의 무책임이 낳은 인재로 드러난 사건사고가 빈발한 반면 제대로 책임지는 고위 공직자를 보기 힘들어서다. 지난해 10월 29일 159명이 허망하게 희생된 서울 이태원 압사 참사는 책임을 회피하는 최고위층 인사들의 건재 속에 잊히고 있다. 지난달 15일 14명이 숨진 충북 청주 오송지하차도 침수 참사에 직접 관련된 여러 기관장 역시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지난달 19일 경북 예천 폭우 실종자 수색 중 해병대원이 익사한 사고의 군당국 수사는 고위급을 빼 외압 논란과 함께 꼬리 자르기란 비난이 인다.
문제가 생겨도 힘 있는 고위 공직자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의적인 책임조차 외면하기 일쑤다. 책임감은 물론 도덕성과 윤리 의식까지 상실한 셈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고위직의 무게감에 어울리지 않는 행태다. 힘들게 오른 자리를 눈치 보며 요령껏 보전하다 나중에 원하는 곳으로 옮겨가는 징검다리로 삼을 심산이지 싶다. 최근 불거진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전관업체들 간 계약 남발과 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가 이를 방증한다. 고위 공직 출신을 위한 전관예우는 경제계에 팽배하다.
이 지경이니 윗선에서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행정을 주문해도 령(令)이 안 서 하위 공무원에게 먹혀들 리 만무하다. 괜히 열심히 일하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보호받기는커녕 무책임한 고위직의 희생양이 될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신입 공무원의 퇴직 증가, 경찰의 순경 부족 현상은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결국 관료사회에 ‘철밥통’ 소리를 듣는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으로 점철된 보신주의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창의적인 업무와 각종 규제 완화·해소가 말처럼 쉽지 않고 비슷한 재난이 반복되는 원인이 있다.
대표적 선출직 고위 공직자로 꼽히는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권의 책임감이 결여된 남 탓 타령은 고질적인 책임 전가의 극치라고 할 만하다. 여야는 일본이 24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많았으나 머리를 맞대 대책을 마련하는 협치 대신 상호 사생결단식 정쟁으로 일관했다. 국민의힘은 방류의 위험성을 외치는 더불어민주당을 괴담 유포 세력으로 성토하고, 민주당은 안전하다는 정부·여당을 맹비난하느라 바빴다. 어민과 상인들이 수산물 소비 실종에 직격탄을 맞아 생존권을 위협받는 상황이지만,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양당은 이달 11일 파행으로 끝난 전북 새만금 세계잼버리대회 부실 운영의 책임을 놓고도 각각 전·현 정부의 무능 탓이라며 거센 공방을 벌인다.
모두 국민의 불쾌지수를 높이고 희생자 유족과 피해자들의 아픔을 키우는 처사다. 정부가 중대 관재(官災)가 일어날 때마다 원인과 책임 소재를 철저히 규명해 지위고하와 친소관계를 불문하고 엄하게 책임을 물어야 비로소 공직윤리가 확립돼 근무 기강이 바로 설 게다. 여야도 국회에 수북이 쌓인 법안을 신속하게 처리하면서 비위 연루 의원을 단호히 내치는 등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건 요원할 뿐이다. 지금은 직무 유기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는 국회를 탄핵할 수 있는 법이나 국민의 국회의원 소환제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 실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계와 정치권에 민생 안정과 경제 성장이란 대의를 위해 제 살도 도려내는 ‘읍참마속’의 각오를 촉구하는 것은 무리일까. 나라 안팎에 위기를 동반한 악재가 즐비하다. 모두에게 강한 책임감이 필요한 시기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08-2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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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분열된 악다구니판을 깨야 나라가 산다
트로이 목마는 기만전술의 전형으로 꼽힌다. 기원전 12세기 도시국가 트로이는 스파르타 왕비를 유괴했다는 이유로 침공한 그리스 연합군의 대병력에 맞서 10년이나 버텼지만, 목마 계책에 속아 하루아침에 멸망했다. 트로이는 그리스가 퇴각하는 척하며 정예군 수십 명을 숨겨 성문 앞에 세워 둔 목마를 전리품으로 여겨 성안에 들여놓고 승리에 도취했다가 목마 속 군사의 야간 기습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간계나 위선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트로이 목마에는 더욱 중요한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트로이 사람들이 성밖 목마를 두고 벌인 결론 없는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일부 장로들은 ‘그리스인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가호를 빌며 아테네 신에게 바친다’란 글이 새겨진 목마를 승전물로 삼아 성내 아테네 신전에 갖다 놓자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들은 목마를 부숴 내부를 살펴보자며 맞섰다. 군중도 양쪽으로 의견이 엇갈려 대립하는 바람에 결정은 왕의 몫이 됐다. 결국 목마를 안으로 옮기는 큰 실수를 낳게 만든 팽팽한 논란은 트로이가 어이없이 패망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같이 소모적인 말다툼이 격화돼 국력 약화 등의 낭패로 이어진 사례는 동서고금에 숱하다. 우리도 구한말 지도층과 지식인들이 친일파와 친청파, 친러파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다 맥없이 나라를 잃은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트로이와 우리나라 역사는 적의 야욕 앞에서 국론이 분열될 경우 망국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일제강점기 민족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은 “국권이 있고 병력도 충분하더라도 국민이 분열하면 패한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도산 선생의 가르침은 지금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 패권전쟁을 벌이며 자국 편에 서기를 강요하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러시아 4개 강대국에 끼어 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하는 엄중한 시기여서다. 북한의 핵위협마저 고조되고 있다. 위기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국익을 챙기는 데는 단합된 힘이 필수적이다. 이는 서방 세력과 러시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혼란에 빠진 결과, 러시아의 침략으로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론 분열로 국력이 분산돼 열강의 요구나 북한 도발에 쉬 휘둘려선 안 될 일이다.
국제 정세가 이런데도 국내적으로는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어 매우 안타깝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당리당략을 앞세운 여야 간 끝 모를 정쟁을 지켜보자니 착잡한 마음뿐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일본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서울~경기도 양평 고속도로 노선 문제 등 불거지는 사안마다 의견 충돌을 빚으며 대립하기 일쑤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듯 상대방 공격에 혈안이 돼 있다. 이 때문에 국회가 처리해야 할 법안은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민생 해결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년 4·10 총선이 다가오자 여야는 서로 지지층을 결집할 의도로 험악한 막말과 욕설을 서슴지 않으며 적대적인 강 대 강 대치로 치닫는다. 진실과 객관적 사고보다는 자기 진영이면 무조건 편들고 다른 편이면 마구 배척하는 걸 중시한다.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민심을 호도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술수일 테다. 타협과 양보를 바탕으로 한 협치의 실종으로 정치가 황폐화된 이유다. 정치권의 편가르기와 갈라치기 탓에 지지자들이 믿고 싶은 것만 사실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고, 남녀·세대·계층·직종 간 갈등도 깊어져 문제가 심각하다. 2017년 삼성경제연구소는 사회적 갈등 관리와 해소에 연간 최대 246조 원이 쓰인다고 밝혔다. 갈수록 볼썽사나운 악다구니판으로 몸살을 앓는 현실을 고려하면 비용 낭비가 엄청나게 늘어났지 싶다.
공멸이 우려되는 분열과 갈등을 이대로 방치하는 건 국가와 미래를 망치자는 것과 다름없다. 나라를 살리려면 극단의 진보·보수로 양분된 구도를 깨 국론을 추스르는 일이 절실하다. 나만 옳다는 생각과 집단적 편향성으로 갈라지고 반목하는 대신 의견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견해를 존중하는 자세가 정치인을 포함한 전 국민에 요구된다. 매사에 이러한 마음가짐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가장 실효적이고 시의적절한 합의나 방안을 도출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제는 모두가 분열을 접고 통합 노력을 우선시해야 마땅하다. 힘을 모으고 한목소리를 내며 국력과 경제력을 대폭 키워 강국이 된다면 미·중·일·러조차 우릴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되레 환심을 사며 지지와 협조를 얻으려고 한국 눈치를 볼 것이다. 기존 고압적인 외교 자세를 바꿔 먼저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올 게 분명하다. 위풍당당하고 국민의 삶이 안정된 국가 건설을 위해 화합과 연대를 적극 도모하자. 국론 분열상에 따른 국내외 비극적 역사를 거울삼아 우리 현실을 제대로 성찰하고 직시한다면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하다.
2023-07-1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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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 본 어업협상
올 3월 16일 도쿄, 5월 7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전후해 2018년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계기로 급랭한 한일 관계는 안보 공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급속히 개선되는 모양새다. 대한상의와 일본상의가 교류를 단절한 지 6년 만인 이달 9일 부산에서 다시 만나 다양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등 양국 경제협력이 재개되는 움직임도 잇따른다.
이 같은 화해 분위기 속에서 국내 수산업계는 한일 어업협상이 재개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앞서 수산업계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어업협상에 대해 논의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대감을 키웠다. 하지만 이 문제가 회담 의제에 포함되지 않자 실망하기도 했다. 조속한 어업협상 재개와 타결은 수산업계와 어업인들의 최대 숙원이어서다.
한일 어업협상은 두 나라 어선이 상대방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조업할 수 있는 척수와 어획량, 기간을 확정하는 일이다. 양국 정부는 1998년 새로 맺은 어업협정에 따라 2015년까지 매년 어기에 맞춰 EEZ 조업 기준을 정하는 협상을 벌여 왔다. 양국 사이 해역이 좁아 국제법이 인정한 200해리(약 370km)를 기준으로 설정된 서로의 EEZ가 겹치는 까닭에 해마다 새 기준을 마련해 온 것이다.
어업협상은 2016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8년간 전면 중단돼 문제가 심각하다. 2015년 협의한 결과의 시효가 끝난 2016년 6월 30일 이후 한일 관계 경색과 일본의 미온적인 태도 탓에 아무런 추가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2011년 후쿠시마원전 폭발사고로 우리 정부가 2013년 일본 8개 현의 수산물을 대상으로 단행한 수입금지 조치에 일본이 강하게 반발한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 EEZ에서의 조업 의존도가 낮아 급할 게 없었던 영향도 컸다.
반면 한국 수산업계는 연안 오염과 어자원 감소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황금어장으로 꼽히던 일본 EEZ 조업권을 잃어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업협상이 장기간 표류하는 동안 수산업계는 EEZ 조업 불가로 어획량이 10만t 이상 줄었고, 누적 피해액은 5000억 원에 달한다. 특히 EEZ 어획고가 전체의 80%나 되는 부산과 EEZ 의존도가 큰 대형선망·기선저인망·채낚기·연승어업의 피해 규모는 막대하다. 선사의 잇단 도산과 어선 감척은 현재 진행형이다. 해양·수산업계가 정부에 어업협상이 시급하다고 줄기차게 지적해 온 이유다.
이같이 위기로 내몰린 수산업계에 초대형 악재까지 닥쳤다. 다음 달로 예정된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가 그것이다. 방류될 오염수의 안전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불안감 확산으로 수산물의 소비 위축 현상이 나타나 수산업은 물론 횟집 등 연관 업종마저 울상이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 호전에 편승해 일본 EEZ 조업으로 돌파구를 찾자는 의견이 일각에서 나온다. 수산업계가 어려움 타개를 위해 어업협상 재개를 거세게 촉구한다면 해양수산부가 이를 피해보상 대책의 일환으로 수용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이 태도를 바꿔 경제협력을 구실로 먼저 협상 추진을 제안할 개연성이 있다. 바다와 수산물의 방사능 오염을 우려해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일본 어민들을 달랠 대체 어장을 확보할 목적에서다.
EEZ 내 조업이 절박한 건 맞지만,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원전 오염수 방류 초기의 어업협상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오염수를 바다에 대량 투기하는 큰 변수가 생긴 상황에서 한일 어업협상 타결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협상 재개 논의에 조심스러운 접근이 요구된다. 만일 우리 어선이 일본 EEZ에 입어해 잡은 물고기가 국산으로 유통되더라도 안전관리 문제가 불거지거나 일본 해역에서 왔다는 이유로 외면받을 게 분명하다.
어업협상이 재개될 경우 일본은 협의 과정에서 이익 극대화를 위해 예전에 비해 더 깐깐하고 무리한 주장을 펼칠 공산이 크다. EEZ 조업을 허용하는 대가로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폐지부터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독도 영유권 주장에 유리한 내용을 관철하려는 모습 역시 예상된다. 이는 지난 3월 일본 초등교과서가 독도를 자국 영토로 명시한 데서 알 수 있다.
정부는 언제든 어업협상 카드가 현안으로 등장할 것에 대비해 수산업계와 허심탄회하게 머리를 맞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신중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주고받을지 그리고 적게 주고 많이 받아 내는 전략을 고심하며 협상 재개의 득실을 꼼꼼히 따져 놓고 있어야 하겠다. 일본이 우리보다 협상력이 낫고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한 사실도 명심할 일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 양국 간 교섭에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이 좋은 무기가 될 듯하다.
2023-06-13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