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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다문화시대 울산, 공존만이 살길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업수도 울산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거리에는 중국어와 영어 섞인 간판이 즐비하다.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외국인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조선업 호황을 맞은 동구는 올해 3월 기준 외국인이 8003명으로 울산에서 가장 많다. 울산 전체로 보면 3만 766명으로 3년 새 7000명이 불어났다. 경기 침체와 일감 부족으로 조선소 독(선박건조장)이 텅 비었다는 기사를 쓴 게 엊그제 같은데 6~7년 지나 딴판이 됐다. 산업현장의 실핏줄이 된 외국인들이 지역 소멸을 걱정하는 시대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기업과 자치단체도 외국인 끌어안기에 공을 들인다. HD현대중공업은 조선업계 최초로 사내에 외국인지원센터를 차려 통역과 고충 상담을 지원한다. 동구청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기초 생활 정보, 질서 등을 알려주는 ‘슬기로운 동구생활 설명회’도 외국인과 주민 화합을 도모하는 지역사회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스리랑카 노동자와 가족 수백 명이 울산에서 자국의 설인 ‘싱할라-타밀 새해’(4월 13일)를 기념하며 고향 음식을 먹고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은 어쩐지 정겹다.
울산 현대모비스 농구단을 응원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목소리, 가자미회를 처음 먹어보는 베트남 노동자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울산의 지속 가능성과 새로운 활력을 느낀다.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별, 혐오로 점철된 다문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도 여전히 짙다. 울산을 비롯해 전국 산업현장에서 숨지는 외국인 노동자는 지난 11년간(2012~2022년) 한 해 평균 108명에 이른다. 사고재해율(2022년)도 전체 노동자(0.49%)보다 외국인 노동자가 0.87%로 높다. 경남 양산 한 제조업체 대표가 기계결함을 알고도 방치해 외국인 노동자 사망사고를 낸 혐의로 울산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자, 이를 중형으로 여길 만큼 우리 사회의 책임 의식은 미약하다.
지난달 19일에는 울산에서 한 외국인 노동자가 체불 임금을 해결하라며 타워크레인에 올라 위태로운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그의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지켜봤다. 지난 5년간(2019~2023년) 우리나라 외국인 노동자 임금체불액은 총 5670억 원이다. 가장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며 가장 낮은 임금조차 제때 받지 못한다.
최근 충북에서 일명 ‘자국민보호연대’란 허울 아래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폭행, 금품을 갈취한 사건은 공분을 자아낸다. 형태와 정도만 다를 뿐 부울경에서 이런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노동착취 사슬의 맨 밑바닥에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해 보다 유연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손이 급하다고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놓고 전후 사정은 무시한 채 기계적인 단속과 추방을 반복하는 악순환은 근절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고충이 더 큰 법이다.
다문화사회의 제반 문제를 다룰 이민청 설립 등이 국가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지역사회도 외국인과의 공존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지역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울산 총선 당선자 주요 공약에 이주노동자 지원책이 눈에 띄지 않는 건 유감이다. 다문화는 이제 포용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다. 공존의 시험대에 오른 울산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 산업계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2024-05-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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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도서관에 가자
매년 4월 12일 ‘도서관의 날’부터 일주일간인 도서관 주간에 공공도서관에서는 ‘대사면’이 이루어진다. 대출 기간을 넘기면 연체한 일수만큼 도서 대출이 정지되는데, 이 기간에 연체 도서를 반납하면 밀린 기간이 얼마든 즉시 대출 정지를 풀어주는 것이다. 책을 빌렸다 하면 대출 기간 2주가 너무 짧게 느껴지고 다음번엔 혹시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대출 기기 화면에 경고 신호가 뜨지 않을까 가슴 졸여 보았다면 반가울 행사다.
대출 정지는 도서관 이용자에게 가장 큰 벌칙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것 말고는 어떤 제재도 없는 관대한 곳이 도서관이다. 공공 소유의 책을 오래 들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읽을 기회를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벌금을 물리지도 않고, 이름을 써 붙이지도 않으며, 도서관 출입을 금지하지도 않는다. 물론 블랙리스트에 올려 다음 대출에 제한을 두지도 않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공공도서관이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서다. 도서관에서는 소비자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대접을 받는다. 음료를 시키지 않아도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고, 카드키 없이도 화장실을 쓸 수 있다. 나이나 옷차림으로 박대를 받을까 봐 쭈뼛거리지 않아도 된다. 결정적으로 구독료를 내지 않아도 책을 무제한으로 볼 수 있고, 책을 보는 대가로 광고를 볼 필요도 없다.
공공의 공간은 갈수록 희귀한 것이 되어간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하루 종일 코를 박고 있는 스마트폰 속 온라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주의력을 갖가지 형태의 광고에 팔아넘기고, 구매력과 구매 의사로 우리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에 아직 동네마다 도서관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는 건 새삼 놀라운 일이다.
도서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환대의 경험 말고도 많다. 책 속에서 동서고금의 지혜를 만나는 건 모범 답안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인권 기록 활동가 홍은전은 〈그냥, 사람〉의 서문에서 13년 동안 활동하던 노들장애인야학을 그만두고 도서관을 다니던 시절을 말한다. 처음에는 신문을 읽고 특강을 들으면서 우물 밖 넓은 세상을 신나게 배웠다고 했다. 그러다 유학파 저자가 보는 세상과 자신이 인권 운동 현장에서 본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머물렀던 우물을 처음으로 들여다본다. 그리고 “세계관이란 나의 우물이 어디쯤에 있고 다른 이들의 우물과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생각한다. 그렇게 얻은 ‘세계관’을 갖고 그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도서관에 가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 경험을 경유해 자신의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그것을 세상에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로 가지 않아도, 이제는 교과서도 선생님도 없는 머리 굳은 어른이 되었더라도, 도서관에 가면 그 길로 가는 샛길이 있다. ‘고객님’을 환영하는 인사는 없지만 질문을 하면 기꺼이 도움을 줄 전문가들도 있다.
부산에는 교육청이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도서관 말고도 서울 말고 한 곳뿐인 국회부산도서관, 책과 보기 힘든 영화도 볼 수 있는 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 오션뷰를 자랑하는 국립해양박물관 해양도서관도 있다. 산책 삼아, 마실 삼아 도서관에 가자.
2024-04-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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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전학생’이 깨운 구도(球都) 부산
초등학교 4학년, 그땐 미처 몰랐다. 30년 넘도록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을 못 할 줄은. 1992년 가을 롯데가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릴 때, 온가족이 함께 TV로 지켜봤다. 그러고 31년이 지난 2023년, 롯데는 7위에 그쳤다. 개인적으로 지난 시즌이 특별했던 건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92년도 우승을 지켜본 11살 소년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태어난 아기가 아빠와 똑같은 학년이 될 때까지… 롯데는 우승을 하지 못했다.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 진출도 단 두 번, 그것도 20세기(1995·1999년) 때 일이다.
야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우 로얄즈 시절 ‘구도(球都) 부산’은 야구를 넘어 축구 도시라 할 만했다. 1997년 K리그와 리그컵 우승 등 3관왕을 달성했던 축구 명가는 2000년대 들어 부산 아이파크로 옷을 갈아입은 뒤 옛 명성을 잃었다. 지금은 1부와 2부리그를 오르내리는 만년 하위 팀으로 전락했다.
롯데 야구와 아이파크 축구를 보고 있으면 연고지 부산을 닮아간다는 느낌이다. 해안 절경과 삐까뻔쩍한 마천루 등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속은 ‘노인과 바다’가 떠오르는 쇠락의 도시. 연고지 현실이 이런데, 프로구단의 성적만 좋기를 바라는 건 몰염치요 사치다.
그런데 올해는 다르다. 정상보다 하위권, 승리보다 패배가 익숙한 부산 프로스포츠계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부산 KT가 떠난 자리에 지난해 전주 KCC가 ‘전학’을 오더니 급기야 우승을 넘보고 있다. 최근 플레이오프에서 ‘부산 KCC’는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정규리그 4위팀 서울 SK에 이어 1위팀 원주 DB마저 꺾고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다. KCC가 4승만 더 거두면 연고지 이전 첫 해 우승, 정규리그 5위팀 우승 등 프로농구(KBL) 사상 최초 기록을 쓰게 된다.
부산 입장에서도 대기록이다. 부산에 연고를 둔 프로구단이 가장 최근 우승한 적은 야구(롯데 자이언츠)가 1992년, 축구(대우 로얄즈)와 농구(부산 기아)는 1997년이 마지막이다. 그나마 농구는 사정이 좀 낫다. 1997-1998, 1998-1999시즌(부산 기아)과 2006-2007시즌(부산 KTF)에 준우승이라도 했다. 2010-2011시즌(부산 KT)에는 정규리그 1위에 올랐지만 챔프전 진출에 실패했다. KCC가 올 시즌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 부산 연고 프로구단이 27년 만에 왕좌에 오르는 큰 경사다. 야구는 32년, 축구는 27년 동안 못 이룬 꿈을 부산에 둥지를 튼 지 1년도 안 된 ‘전학생’이 해내는 것이다.
부상 같은 변수만 없다면 객관적인 전력상 ‘슈퍼팀’ KCC가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할 확률은 매우 높다. 같은 부산 연고의 ‘토박이 팀’ 롯데와 아이파크로서는 마냥 축하할 수만 없는 머쓱할 일이다. KCC 전창진 감독은 챔프전 진출을 확정한 뒤 “부산이란 도시는 성과만 내면 시민들께서 보답을 해주신다. 책임감을 갖고 더 열심히 하겠다”며 우승의 이유로 ‘팬’을 꼽았다. 구도 부산을 놓고 야구·축구 대신 농구를 먼저 이야기할 날이 머지않았다. 구도의 역사를 다시 깨운 농구 앞에서, 야구와 축구는 분발해야 하지 않겠나. 전학생에게 승리 방정식, 우승 DNA를 배워 이대·삼대의 팬들에게 보답해야 하지 않겠나. 32년 전 그 아이가 묻는다.
2024-04-2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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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대한민국의 위기와 보복 정치에 빠진 정치권
요란스러웠던 총선이 끝났다. 이번 총선을 지켜보면서 절실하게 느낀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권이 양극단으로 치달으며 이상향(유토피아)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기는커녕, 대립과 반목의 디스토피아로 향하는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부산일보〉는 이번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이 가진 ‘정치적 확증 편향’이 총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얼마나 심각한지 들여다보는 기획 기사를 게재했다. 정치적 확증 편향이 심각할 것이라는 가설로 시작해, 정치적 확증 편향에 빠지기 쉬운 정치 이슈와 정보를 직접 엄선해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기획 의도와 어긋남이 없었다.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치적 양극화의 심각성을 마주하며 뒷맛은 영 개운치 않았다. 기획을 자문한 김대경 동아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설문 결과에 대해 “확증 편향을 증폭하는 미디어 알고리즘과 정치권의 대립, 혐오가 국민들을 감정적이고 정서적으로 반응하게 하고, 이는 정치 이념을 고착화·강화해 정치적 집단화와 양극화를 심화시킨다”고 평가했다. 이어 “집단화되고 양극화된 정치 세력은 특검법을 위시한 정치적 보복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대놓고 복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등 보복과 복수의 정치로 흘러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총선 이후 보복과 복수의 정치가 현실화될까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또 다른 하나는 총선 과정에서 쏟아진 각종 공약을 톺아볼 때 국가균형발전은 더욱 요원할 것 같다는 암울한 현실 자각이다. 수도권에선 광역급행철도(GTX) 사업 공약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경기 외곽에서 서울 중심부까지 30분 내에 이동할 수 있도록 계획된 GTX는 최근 GTX-A 노선 부분 개통을 통해 본격적인 수도권 GTX 시대를 열었다. GTX-B·C 노선 착공과 GTX D·E·F 노선의 국가 철도망 계획 반영도 정부와 정치권의 높은 관심와 지원 속에 일사천리로 추진될 기미다. GTX 노선의 수혜가 예상되는 수도권 부동산 시장도 덩달아 달아오르는 분위기다.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대기업 유치, 서울 개발 제한 해제 후 대규모 개발 추진, 김포 등 서울 인접 지역 서울 편입 공약…. 수도권 공화국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지고, 지역 청년들은 그 블랙홀에 더욱 빨려들어갈 기세다. 거대 양당은 이번 총선에서도 우리나라 인구의 과반이 사는 수도권 공약에 공을 들였고, 지역과 균형 발전은 뒷전이었다.
총선이 끝난 지금, 대한민국은 또다시 어두운 터널 앞에 서 있다. 야당은 강력한 의회 권력을 거머쥐었고, 여당은 개헌선 저지를 위안으로 삼는다. 향후 정국 방향도 눈앞에 그려진다. 국회와 정부는 엇박자를 내고, 국회의 잇단 특검법 발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정부의 시행령 통치로 다음 대선까지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공존과 발전을 위한 건강한 정쟁은 없고, 원한과 복수가 난무하는 정쟁의 시즌이 머지않았다는 건 결코 무리한 전망이 아니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 등 균형 발전을 위한 굵직한 지역 현안들이 무의미한 정쟁 속에 묻히고, 수도권 과밀화와 맞물려 지역 청년 인구 이탈, 저출생 쇼크, 지역 의료 붕괴 등의 총체적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이 또 3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까 심히 걱정스럽다.
2024-04-1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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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4월 10일은 '가짜'를 걸러내는 날
오는 10일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일이다. ‘가짜’를 걸러내는 중요한 날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가짜의 면면을 살펴보자. 우선, 2018년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진 고 윤창호 씨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후보들이 많다. 음주운전 전과가 있음에도 공천을 받은 후보가 50명이 넘는다. 술에 취한 채 운전대를 잡는 건 잠재적 살인 행위이라는 것이 국민 눈높이다. 이들이 진짜였다면 고 윤창호 씨에게 미안해서라도 스스로 선거판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또 겉으로는 공정을 외치면서 정작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가짜들도 있다. 대학생 딸 명의로 11억 원의 사업 자금 편법 대출을 받아내고도 ‘자신의 대출로 피해를 본 사람이 없다.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한 후보도 있다.
한 비례 후보의 경우 남편이 검사장 퇴임 후 1년 만에 재산이 41억 원이 불어나 전관예우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후보는 “전관예우라면 최소한 160억 원을 벌었어야 했다”며 떳떳했다. 당 대표도 그녀를 두둔하고 나섰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한숨부터 나왔다. 그녀를 지지한 당 대표는 1년 전 전관예우를 ‘전관 범죄’라고 칭하며 극도의 혐오를 보인 인사다. 무엇보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절대 용납하기 힘든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도 비례 정당을 창당했다. 정치에서 양심은 예외인가라는 좌절감마저 든다.
이처럼 하자 있는 가짜들이 반성은커녕 끝까지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이 먼저 떠오른다. 시뮬라시옹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정당 이미지로 실체를 포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 등 야권의 뿌리는 양심과 도덕에 있다고 여전히 믿는다. 갖은 고초에도 과거 군부·독재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에 앞장섰던 게 주된 이유이다. 그러나 그릇도 안 되는 가짜들이 이 같은 이미지를 이용해 마치 자신도 양심적인 투사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부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고위 공직자가 됐다. 그러나 늘 그렇듯 본성은 곧 드러나는 법이다. ‘암컷’ 발언으로 여성을 비하한 전 의원, 국회 상임위 중 거액의 코인 거래를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현역, 부하 여성 직원을 성추행한 후 반성보다는 진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한 인사들이 대표적이다.
여기다 진보 진영이라는 우산 아래 구축된 ‘도덕적 면허’도 크게 작용한다. 도덕적 면허는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부도덕해지기 쉽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행동일지라도 자신이 하면 옳다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편법 대출, 갭투기, 전관예우, 자녀 비리 혐의 등 총선 기간 중 발생한 논란 대다수는 진보 진영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요즘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옳은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논란이 터져도 ‘친명(친이재명)’계 후보를 ‘묻지마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권도 예외는 아니다. 결국은 유권자의 몫이다. 이번에는 가짜를 찍지 말고 조금 밉더라도 진짜를 찍으면 좋겠다. 유권자들이 가짜를 심판할지 아니면 가짜들에게 지배당할지 두고 볼 일이다.
2024-04-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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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이번에도 바뀐 것 없이 잊히고 있다
2018년 3월 6일 오후 2시 10분께 통영시 욕지면 좌사리도 남서방 2.5해리 해상에서 쌍끌이중형저인망어선 제11제일호가 뒤집혀 선원 11명 중 4명이 숨지고 4명이 실종됐다. 당시 사고는 기상 악화에도 불법 조업을 위해 무리하게 운항하다 선체 복원력이 떨어진 게 원인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꼬박 6년이 지나 바로 인근 해역에서 유사한 사고가 또 발생했다. 지난달 14일 오전 4시 20분께 욕지도 남방 4.6해리 해상에서 쌍끌이대형저인망 제102해진호 전복돼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번엔 포획한 물고기 상당량을 어창이 아닌 어선 한 귀퉁이에 쌓아두면서 무게 중심이 쏠려 선박이 복원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문제는 반복되는 참사에도 크게 나아진 게 없다는 점이다. 최근 지구 온난화 등 이상기후로 어획량이 줄면서 어선 사고 위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어민 의식과 제도는 제자리걸음이다.
어민들은 생계를 위해 궂은 날씨에도 바다로 나간다. 현행 어선안전조업법에 따라 태풍주의보‧태풍경보‧풍랑경보 땐 모든 어선이 출항할 수 없다. 풍랑주의보 발효 시엔 30t 미만 어선만 출항이 금지된다. 그러나 15t 이상 어선이 2척 이상 선단을 편성하고 어선 간 거리를 9.6km를 유지하면 조업에 나설 수 있다. 게다가 기상특보 발효 전에 출항했다면 회항시킬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기상이 나쁘면 경쟁 조업을 피할 수 있어 무리해서 나서기도 한다.
각종 해난 사고에 대비한 제도들 역시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102해진호에 앞서 욕지도 남쪽 37해리 해상에서 전복된 채 발견돼 선원 9명 전원이 숨지거나 실종 상태인 제주선적 제2해신호의 경우, 엉터리 위치보고와 안전 장비 오류로 구조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풍랑특보가 발효된 해역에서 조업 중인 어선은 12시간 간격으로 위치를 보고해야 한다. 제2해신호가 실제 뒤집힌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은 8일 오후 8시 55분께다. 그런데 이로부터 1시 48분 후인 오후 10시 43분, 제주어선안전조업국에 제2해신호 위치보고가 들어왔다.
제2해진호 선단장이었던 105명진호가 레이더에서 사고 선박의 어구를 표시한 전자 부이를 제2해신호로 착각해 ‘정박 중’이라고 통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당국은 9시간이 지난 9일 오전 6시가 넘어서야 사고 사실을 인지했다.
각종 안전 장비도 무용지물이다. 정부는 2011년부터 모든 어선에 GPS 기반 선박입출항자동신고장치(V-PASS)와 자동선박식별장치(AIS) 등 ‘선박위치발신기’ 부착을 의무화했다. V-PASS는 외부에 설치된 송·수신 안테나가 거치대에서 분리되거나 어선이 좌우로 70도 이상 기울면 어선 위치와 구조 신호를 자동으로 발신한다. 그런데 신호 통달(송수신)거리가 30km 남짓이라 먼바다에서 조업하는 근해어선엔 무소용이다. 제2해진호도 마찬가지. 사고 전후로 해경 상황실엔 조난 신호가 닿지 않았다.
이는 사고가 나면 으레 지적되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매번 그랬듯 이번에도 바뀐 것 없이 잊히고 있다. “한평생 고생만 한 내 동생 몸뚱이라고 만져 볼 수 있게 제발 찾아만 달라”. 동생을 기다리던 제2해신호 기관장 윤 씨 누나의 절규가 계속해서 귓전을 맴돈다.
2024-04-0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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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한국에서 애 낳은 바보'의 제안
이 칼럼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기까지, 예상했던 시각보다 꼬박 3시간 35분이 더 흘렀다. 셋째는 아빠를 두고 왜 엄마에게만 책을 들이미는 건지, 숙제 시작 후 5분도 못 버티고 엉덩이가 들썩이는 아들을 다시 앉히는 기술은 왜 엄마만 타고 나는 건지 모르겠다. 학교 알림장에 3주째 ‘○○ 안 해 온 사람’ 목록에서 아들 번호가 사라지지 않으니 준비물과 숙제도 다시 챙겨야 했다. 집안일까지 완수한 뒤 노트북 앞에 앉으려는데, 셋째는 솜이 튀어나오는 애착 인형 바느질도 해 달란다. 그렇게, 퇴근하고 처음 등을 기대고 앉은 시간이 밤 10시였다.
안다. 우리 어머니 세대는 이보다 더 고달팠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삶은 비단 아이 셋 워킹맘만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또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워 0.72명을 기록했고, 부산은 0.66명까지 떨어졌다. 최근 만난 한 20대 여성은 1~2년 새 주변에 7쌍이 결혼했는데 아이를 낳겠다는 커플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진화생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진화적 적응 현상이라고 했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상황이 좋아져야만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2021년 11월 유튜브에 ‘한국에서 애 낳으면 바보’라는 영상을 올려 화제가 됐는데 “‘과연 아이를 제대로 키워낼 수 있겠느냐’를 심각하게 고민한 뒤에도 애를 낳는 사람이 있다면 계산이 안 되는 분들, 바보”라고 했다.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수당부터 시작해 아빠 육아휴직, 유연근무제 등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장벽은 학교에 입학하면 더 높아진다.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달리 오후 1시 무렵 끝나는데, 부모는 저녁 6~7시가 돼야 퇴근한다. 매일 맞닥뜨리는 ‘갭’이 5~6시간이다. 최종 목적지가 입시인 경쟁 교육에서 이 갭의 질에 따라 승자가 가려진다. 경제적 능력이 되고, 엄마도 집에 있으면 승자가 될 확률이 높다. 중·고등학생이라면, 엄마의 정보력과 ‘라이딩’이 아이를 ‘좋은 학원’으로 데려가고, 결국 ‘좋은 대학’으로 데려다 준다.
대부분은 경제적 능력과 집에 있는 엄마,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어렵다. 맞벌이 가정에서 아이만 ‘학원 뺑뺑이’를 돌리다 결국 상담실을 찾는 사례도 많다. 아이와 부모 모두 고생만 ‘진탕’ 하고, 나쁜 결과는 모두 ‘내탓’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직장 대신 아이를 선택한 경력단절 여성들의 좌절 경험치는 우리 사회에 쌓이고 쌓여 ‘출산 파업’의 밑거름이 됐다.
1년 전 스웨덴에서의 일상을 잠시 빌려 오자면, 그곳에선 학교 정규 수업이 오후 3시 무렵 끝났고 부모는 오후 4~5시에 퇴근했다. 방과후 활동이나 체육 활동을 하며 보내는 갭 1~2시간에 대한 부모 만족도도 매우 높아 학원 뺑뺑이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한국 사회도 인구절벽을 ‘재난’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현금 퍼주기 정책이 효과가 없었다면 학교 정규교육 시간을 더 늘리고 부모 퇴근 시간을 앞당기는 건 어떨까. 육아기 단축근무로 일부에게만 의무와 눈치를 지울 게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퇴근을 앞당기자. 생애 전주기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야 우리 사회에 자녀도 늘 수 있다.
2024-03-2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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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왜 에어부산 분리매각인가
에어부산의 ‘지역 지우기’를 규탄하는 보도가 연일 지면을 장식한다. 지역 사회의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그동안 지역을 지운 기업은 한둘이 아닐 게다. 서울로 본사를 이전하거나 ‘서울 지사’가 ‘부산 본사’를 압도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에어부산은 지역 상공계와 시민사회 힘으로 키워낸 향토 기업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런 기업이 지역의 목소리를 외면하려 하니 시민들이 느끼는 허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에어부산의 역사는 2007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에어부산 창립 멤버이자 에어부산 사번 1번인 신정택 세운철강 회장이 부산시에 시민항공사를 제안한 것이 시작이다. 부산시를 비롯한 지역 기업인들이 시민항공사 만들기에 의기투합했다. 제2 도시 부산을 출발점으로 세계 하늘길을 누비는 항공사를 만들어보자는 부산의 꿈은 부산국제항공 탄생으로 현실이 됐다. 하지만 지역 기업인들이 사업을 직접 운영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신 회장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을 만나 주주 참여를 호소하면서 운항사업이 비로소 탄력을 받았다.
출범 이듬해인 2008년 말 부산~김포 노선 첫 취항을 시작으로 10년째 김해국제공항 1위를 지킨 에어부산은 시민들과 늘 함께 했다. 지역민들도 에어부산 항공권 구입에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에어부산의 지난해 국제선 여객 수는 363만 7586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수치를 앞지르면서 회복률 100%를 넘어섰다. 다른 저비용항공사(LCC)들이 인천을 거점으로 한 와중에 지역을 지키면서 거둔 성과라 더욱 의미 깊다.
지역 상공계를 비롯한 부산 시민사회는 에어부산이 가덕도신공항 거점 항공사의 적임자라고 여겼다. 지역의 오랜 숙원이었던 가덕도신공항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지역에 뿌리내린 항공사가 운영을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과 모기업인 아시아나항공 기업 결합으로 위기에 몰린 에어부산을 살리기 위해 ‘분리매각’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에어부산은 지역성과 역사성, 성장 가능성을 두루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뒷걸음치기 바쁘다, 아니 쪼그라들고 있다. 산업은행의 관리 아래 직원을 마음대로 채용할 수 없고 5년째 임금이 동결되면서 한때 1500명에 육박하던 직원들은 1200명으로 줄어들었다. 모기업의 기업 결합으로 가지고 있던 슬롯(특정시간대 공항 이착륙 권리)들도 내놔야 할 우려가 크다. 신규 노선 확보도 불투명하다.
이 상황에서 에어부산 전략커뮤니케이션실이 전격 해체됐다. 지역 소통 창구의 부재는 분리매각을 촉구하는 지역 요구를 무시하겠다는 처사다. 이 같은 지역에 대한 몰이해는 정부, 산은, 모기업, 정치권 등 에어부산을 둘러싼 조직 전반에 걸친 수도권 중심주의에 기인한다. 항공산업 역시 인천국제공항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집중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민생토론회에서 “인천국제공항을 중심으로 항공산업을 크게 키우겠다”고 발언한 이후 쏠림 현상은 가속화할 전망이다. 가덕도신공항이 세계 7위 부산항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항공 물류를 재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가뿐히 무시된다.
지역에도 삶이 있다. 지역 경제도 이웃 국가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지역 공항은 지역 생존과도 직결된다. 독립된 거점 항공사는 가덕도신공항을 살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에어부산 분리매각을 외치는 본질적인 이유다. 지역민의 외침을 도외시한 말잔치용 국가균형발전 공략으로는 지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2024-03-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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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4·10 총선, '국립산박' 추진력 얻는 전환점 돼야
대통령 공약이자 울산 숙원인 국립산업기술박물관(이하 ‘국립산박’) 건립이 4·10 총선에서 외면당하는 분위기다. 흔한 총선 공약 어디에도 국립산박 건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울산 공약 1호로 산업수도 위상 구축을 내걸었다. 그 핵심 과제로 제시한 것이 국립산박 건립이다. 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이 모두 울산공약으로 내세울 만큼 국가적 필요성이 강조된 사안이다. 지역 균형발전 차원에서도 명분이 뚜렷하다 할 수 있다.
이에 정부는 2013년 9월 13일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울산에 국립산업기술박물관 건립을 확정했다. 울산유치범시민운동본부가 발족해 30만 명 시민 서명을 받은 지 1년 7개월 만의 성과였다. 정부가 서울 용산에 1조 2000억 원을 들여 설립하려던 국립산박을 울산 시민의 힘으로 산업수도 울산에 유치한 것이다.
하지만 국립산박 건립은 어느덧 12년째 장기 표류하는 그저 이름뿐인 대선 공약으로 전락한 상태다. 규모나 시기 등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결정된 것이 없다.
애초 세계 최대 규모 산업기술박물관을 목표로 1조 2000억 원에 달하던 사업비는 장기간 정부와 지자체의 ‘핑퐁 게임’에 휘둘리다 어느새 1386억 원까지 쪼그라들었다. 문제는 이 사업비조차 온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립’이라는 이름이 민망할 수준이다. 수지타산에 치중하는 정부 태도가 원인으로 꼽히지만, 공공기관을 지을 때 항상 부딪히는 기본적인 문제다. 무엇보다 시민사회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이를 정부에 전달하는 지역 정치권의 가교 역할이 절실한 시기다.
멀리 갈 것 없이 지난해 누적 관람객 1000만 명을 달성한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을 보라. 올해 개관 12주년을 맞은 이 박물관은 시민사회와 상공계, 언론, 정치권의 꾸준한 관심 속에 명실상부 국내 해양 문화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총선은 국립산박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고 재충전의 씨앗을 퍼트릴 중요한 전환점이 돼야 한다. 국립산박을 원상회복하려는 정치권의 노력도 뒷받침돼야 한다.
울산시도 국립산박 총선 공약화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약속한 것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는데 제아무리 거창한 사업을 계획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국립산박은 장차 대한민국 성장 DNA를 전 세계에 알릴 국가적 자부심이자 미래 산업 발전의 요람이 될 것이다. 해외 주요 기술 선진국은 이미 100년, 200년 전부터 산업기술박물관을 세워 산업 역량과 기술 발전상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국민적 자긍심도 고취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국립산박을 놓고 결자해지를 외치던 정치인들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조용하다. 4년이 흐른 지금 반성은커녕 제 살길 찾느라 애가 타는 모습이다. 언제까지 국립산박을 선거 들러리로 세워둘 것인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도록 유권자들의 날카롭고 끊임없는 비판이 뒤따라야 한다. 110만 시민이 국립산박 건립을 매의 눈으로 지켜본다는 사실을 이번 총선에서 확실히 일깨워야 한다.
2024-03-0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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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병원에서 행복한 노인은 없다
영화 ‘플랜 75’에 병원은 딱 한 번 나온다. 혼자 살면서 호텔 청소일을 하는 78세 미치와 그의 단짝 동료가 후기 고령자 암 검진을 받는 장면이다. 동료는 “이제 이런 검사도 악착같이 살려는 것 같아 눈치가 보인다”고 말한다. 대기실 TV 속 플랜 75 홍보 영상에서는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니지만, 마지막은 내가 선택하겠다”며 환하게 웃는 여성 노인과 함께 “75세 이상에게는 무료입니다”라는 친절한 안내가 흘러나온다.
영화의 배경은 75세 이상 노인의 안락사를 국가가 조력하는 가상의 법안인 ‘플랜 75’가 시행된 지 3년이 된 일본이다. 플랜 75는 만 75세가 되면 건강 기록도, 가족 동의도, 주민 등록이 없이도 신청할 수 있다. 마음대로 원하는 곳에 쓰라며 준비금 10만 엔도 준다. 가족 사진 촬영을 포함한 호화 패키지 같은 민간 시장이 창출되고, 정부는 성공적인 고령화 정책이라 자평하며 65세로 대상 연령을 낮추는 것을 검토한다.
감독은 2016년 일본의 한 장애인시설에서 일어난 테러에 착안해 영화를 만들었다. 중증장애인 19명을 무차별 살해한 테러범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편지를 남겼다. 이 대사는 영화의 첫 장면에 법안의 계기가 되는 노인혐오 범죄로 변주돼 등장한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의 기준은 뭘까. 미치는 건강하고 근로 의욕도 있지만 이 기준에서 밀려난다. ‘노인들이 일하는 게 불쌍하다’는 투서를 핑계로 호텔에서 해고되고, 취직은커녕 살 집을 구하는 것도 거절당하고, 생활고와 동료의 고독사 끝에 그는 결국 플랜 75를 선택한다.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에도 이 질문이 나온다. “사회에 도움이 안 되면 살면 안 되나요?” 저자는 안락사와 존엄사 논쟁에서 존엄한 삶의 경계는 무엇인지, 대체 가능한 선택지가 없을 때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성립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는 병원에서 행복한 노인은 없다고, 누구나 삶의 마지막은 간병 보험을 받으며 지역 사회에서 살다가 집에서 혼자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줄다리기가 길어지고 있다. 증원의 핵심 근거는 고령화다. 2025년이면 65세 이상이 인구의 25%를 넘겨 의료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는 것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진료비는 해마다 늘어 이미 전체 진료비의 43%를 넘겼다. 한편으로 학계에서는 노화를 역행할 수 있다는 최신 노화 연구가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의료 소비자인 노인은 한 덩어리의 숫자로 취급될 뿐 정책에서 소외된다. 볼썽사나운 드잡이 어디에서도 갈수록 길어질 노년기의 건강한 삶을 위한 통합 의료 서비스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 속에서 건강보험과 병원의 역할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하는 세심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노인은 의료 서비스의 푼돈 손님이나 쇼핑 중독자이기 앞서 질병과 죽음이 두려운 환자이고, 존엄을 지키면서 이웃과 함께 살고 싶은 시민이다. 의사의 노동 환경과 입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환자의 복지와 국민의 건강을 위한 의료 개혁을 기대한다.
2024-02-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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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화해의 핑퐁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한창이다. 취재 중인 걸 알고리즘이 어떻게 알았는지, 유튜브 추천영상에 ‘이색 탁구 대결’ 같은 콘텐츠가 뜬다. 라켓 대신 냄비뚜껑, 국자를 들고 겨루는 경기를 방송에선 ‘이색·묘기 탁구’로 묘사했지만, 기자에겐 익숙한 장면이다. 학창 시절, 책상을 붙여 큰 테이블 만들고 가운데엔 교과서를 세워 네트로 삼는다. 필통을 라켓 삼아 ‘톡 탁 톡 탁’. 소리를 들은 친구들이 몰려들고, 작은 경기는 어느새 반 전체가 참가하는 리그전으로 바뀐다. 교실과 운동장을 오가며 놀거리가 많았던 그때, 굳이 어설픈 판을 벌일 정도로 ‘탁구’는 친숙한 스포츠였다.
스포츠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어도 몸소 깨달은 장점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연습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 개개인의 운동 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들인 시간만큼 실력이 향상된다. 성실함, 땀방울의 가치를 가르치는 데 이만한 교육자료가 또 있을까. 둘째, 건강한 승부욕. 대부분의 스포츠 규칙이 승패를 가리는 방식이다 보니 상대와의 경쟁은 필연이다. 그래도 공은 둥글고, 출발선은 같다. 셋째, 반칙은 나쁘다는 원칙이다. 규칙을 지키는 이들을 바보 취급하는 세상에서, 그나마 ‘반칙→처벌’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뭇 일이 그러하듯 스포츠도 부작용이 있다. 들인 노력과 달리 운 때문에 패배를 맛보기도 하고, 승부욕이 지나쳐 다툼이 생길 때도 있다. 심판이 공정하지 못하면 억울한 판정이 난무한다. 바꿔 생각하면, 선을 넘지 않도록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니 이 또한 장점이 아닐까. 실로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은 모든 학생들이 스포츠 종목 하나씩은 익히도록 학교체육을 강조한다.
때마침 부산에서 국내 최초로 세계탁구선수권이 열리고 있으니 우리에게도 절호의 기회다. ‘아침 체인지’ 정책으로 학생들에게 운동을 유도하는 김에, 지역 특화 스포츠로 탁구를 가르치는 건 어떨까. 유남규·현정화 같은 부산 출신 탁구 레전드, 1991년 지바 선수권 남북단일팀 금메달의 영광 등 역사 공부는 덤이다. 어린이·어른 할 것 없이 시민들 한 명 한 명의 가슴마다 자부심 피어오른다면, 탁구를 매개로 부산이 글로벌 도시가 되는 꿈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 테다.
탁구 인기가 중동에서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지난 카타르 아시안컵에 출전한 태극전사들이 탁구를 즐겼다 하니, 일단 호텔마다 탁구대가 있다는 게 부럽다. 아무리 탁구가 좋아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 시절, 수업 종이 울렸는데도 계속 ‘책상 탁구’를 쳤더라면 카타르 도하의 ‘핑퐁 사태’보다 더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으리라. 혹여 사이가 틀어진 이가 있다면 탁구 복식을 추천한다. 둘이 한 팀이 되어 한 번씩 번갈아 치는 복식은 혼자만 잘해봐야 소용없다. 이번 부산세계탁구선수권처럼 앞뒤 선수끼리 믿음이 중요한 5단식 3선승제의 ‘단체전’도 묘미가 있다. 다음 달 북중미 월드컵 예선을 앞둔 태극전사들. 손흥민과 이강인의 몸싸움을 야기한 ‘탁구 게이트’로 흔들렸던 팀워크를, 소집 첫날 이번엔 캡틴 손흥민의 지휘 아래 탁구로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2024-02-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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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더 이상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잃지 않도록
얼마 전 일이다. 여섯 살 난 둘째가 금요일 저녁 몸이 축 늘어지더니 다음 날 열이 펄펄 끓었다. 해열제는 좀체 듣질 않고 체온은 39도를 향해 달려갔다.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가까운 동네 소아과로 향했다. 소아과에서는 상급종합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며 진료 의뢰서를 써줬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둘째는 세 살 때부터 열이 오르면 열성 경련을 했다. 열성 경련으로 눈이 돌아간 아이를 둘러업고 응급실로 향했던 적이 여러 번이다. 지난해엔 코로나19에 걸려 열성 경련 탓에 소아병동에서 1주일 가까이 격리 치료를 받는 고생도 했다. 소아 열성 경련은 고열이 지속되면서 의식을 잃고 눈이 돌아가면서 손발이 떨리고 전신이 뻣뻣해지는 증상이다. 열성 경련이 나타나면 먹는 해열제도 듣지 않고 해열 주사를 맞아야 한다. 병원에서는 둘째가 열성 경련을 여러 차례 앓은 적이 있어 ‘요주의 인물’로 분류돼 있다.
그러나 아이를 데리고 간 종합병원 응급실에서는 “소아과 전문의가 없어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열성 경련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그 병원에 그 응급실이었지만, 응급실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은 “119로 전화해 진료 가능 병원을 안내받으라”는 게 전부였다. 119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을 안내받았지만, 소아과 전문의가 없다며 진료가 안 된다는 건 매한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40분은 족히 걸릴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려던 찰나, 119에서 다시 전화가 왔고 근거리에 있는 달빛어린이병원을 안내해 줬다. 달빛어린이병원은 평일 야간이나 휴일 소아 환자를 진료해 주는 병원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주말에 소아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이 있다는 데 감사했고,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소아과 의사들과 간호사분들은 또 어찌나 고마웠는지. 어린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겪었고 공감할 만한 경험이다.
그날 느낀 점은 두 가지다. 먼저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 소아과가 사라지고, 응급실에도 소아과 전문의가 없어 소아응급환자가 진료받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어린이날 연휴 서울 한복판에서 열이 40도까지 오르던 다섯 살 정욱이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지만 진료를 할 수 없거나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숨졌다. 하지만 그날 이후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비슷한 뉴스가 보도되고,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서는 응급실 뺑뺑이 경험이 공유되고 있다.
다음은 달빛어린이병원의 존재감이다. 위급 상황 시 응급실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든든하고 의지가 된다. 부산 지역 달빛어린이병원은 4곳이었지만, 이달 1일 서부산권에 2곳이 추가로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그럼에도 달빛어린이병원으로는 응급 소아환자에 대한 완벽한 대처가 어렵다는 한계가 분명하다. 현재 소아과와 산부인과 등 필수 의료와 지방 의료의 인력·시스템 부재로 촉발된 의사 증원 문제가 뜨거운 감자다. ‘아이 안 낳는다 말만 하지 말고 태어난 아이라도 (소아응급 의료체계의 부실로) 안타깝게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정욱이 사건’ 이후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남겼던 말이다. 정부와 우리 사회가 깊이 되새겨 볼 일이다.
2024-02-1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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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한동훈의 모비딕 활용법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 덕분이라 해두자. 10년 만에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다시 읽기 시작했던 건. 이번이 3번째이다. 모비딕은 한 위원장의 뜻밖 행보에 의해 ‘역주행’했다. 한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법무부장관 임기 마지막 날이자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한 당일 예비 고등학생에게 모비딕을 선물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와 동시에 ‘진짜 정치 초보’로서 총선이라는 큰 바다로 나가야 할 중요한 순간에 ‘왜 모비딕을 선물했을까’라는 궁금증이 확산됐다.
소설 모비딕은 고래잡이 선원들이 거대한 향유고래인 모비딕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작품이다. 모비딕을 잡기 위해 나선 모든 이들이 결국 다치거나 죽으면서 모비딕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한다. 특히 소설 속 주인공 에이해브 선장과 스타벅 일등항해사의 리더십은 현재까지도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회자된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소설 속 인물, 에이해브는 복수의 화신이다. 모비딕과 사투를 벌이다 다리를 잃은 후 무모하게 모비딕을 잡으러 다닌다.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배에 함께 탄 선원들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면 스타벅은 합리적 성향의 인물로 벼랑 끝으로 치닫는 에이해브를 견제한다.
그렇다면 한 위원장은 국힘 수장이 된 후 모비딕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 했을까? 한 위원장이 그동안 보여온 행보로 짐작하면, 모비딕은 누구도 쉽게 잡기 힘든 총선 승리 또는 대한민국의 미래로 풀이된다. 또 윤석열 대통령, 한 위원장,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모두 모비딕을 잡기 위해 치열한 승부를 벌이는 인물들이다. 국힘이라는 배의 선장으로서 한 위원장은 에이해브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타벅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법하다.
최근에서야 그 고민에 대한 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한 위원장이 현 정부의 역린인 ‘김건희 여사 명품백 논란’을 놓고 윤 대통령과 정면충돌한 점에서 에이해브보다는 스타벅의 길을 가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윤 대통령과 ‘친윤(친윤석열)’은 많은 국민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김 여사 명품백 논란을 해결하지 않은 채 모비딕을 잡으러 간다는 점에서 무모한 에이해브를 연상시킨다.
한 위원장은 또 다른 에이해브에게도 일침을 날렸다. 바로 이재명 대표와 ‘운동권’ 세력들이다. 국회 상임위 중 코인 거래 논란,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 이재명 사법리스크. 이보다 앞서 2018년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2020년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성비위 의혹 등 이른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민주당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반성은커녕 내로남불하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이들에게서 목적을 취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에이해브가 떠오르는 건 비단 나뿐일까?
중요한 건 앞으로다. 소설에서는 모비딕을 잡으러 간 사람들이 결국 에이해브의 광기에 끌려 화자인 이슈메일을 제외하고 모두 수장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제 첫 걸음을 뗀 한 위원장의 행보가 소설처럼 선원들을 비참한 최후로 이끌지, 아니면 모두 생존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줄지 ‘한동훈의 모비딕’이 자못 궁금하다.
2024-02-0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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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설익은 지방의회 인사권 독립…'눈칫밥' 먹는 의회직
“내쫓거나 대놓고 눈치 주는 사람은 없는데, 그래도 신경 쓰이죠.” 요즘 청사 구내식당에서 ‘눈칫밥’ 먹는 경남 통영시의회 사무국 직원들의 한숨 섞인 푸념이다. 꼬박 1년 만에 재현된 사무국 인사권 갈등. 통영시장과 의장 간 힘겨루기에 애먼 공무원만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다.
2022년 1월 13일 시행된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에 따라 지방의회 의장은 의회 사무직원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업무 연속성과 전문성을 확보하면서 인사 운영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통영시의회는 이를 근거로 지난달 5급 직원 1명과 8급 직원 1명에 대한 자체 승진 인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자 통영시가 발끈했다. 인사 적체가 심각한 상황에 사무국이 자체 인사를 하면 통영시 전체 결원 발생 요인이 적어져 승진이 어렵고 효율적인 인력 배치도 힘들다는 게 통영시 주장이다. 통영시 전체 공무원 1064명 중 의회사무국 소속은 27명이다.
그러면서 ‘통영시-통영시의회 인사운영 협약 종료’를 통보했다. 이 협약은 직원 수가 적고 자체 예산이 없는 기초의회 인사권 독립을 위한 보완 장치다. 집행부와 인사 교류, 사무국 직원에 대한 보수 지급·교육 훈련, 휴양시설·건강검진비 등 후생복지사업 지원 근거 등을 담았다.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행정안전부가 내려준 표준안에 맞춰 전국 대부분 지자체와 기초의회가 유사한 협약을 맺었다.
협약을 파기한 통영시는 후속 조치로 시의회 파견 공무직 3명과 청원경찰 1명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앞으로 사무국에서 필요한 인력을 비롯해 직장 어린이집, 구내식당, 직장상조회, 청사·물품 관리, 전산시스템, 보수지급 업무까지 의회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시의회가 홀로 사무국을 운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선 넘은 보복 조치에 참다못한 소수 야당 시의원들이 “몰상식과 갑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라며 여당 의장에게 힘을 실었다. 제9대 통영시의회는 국민의힘 8명, 더불어민주당 4명, 무소속 1명이다.
정작 여당 의원들은 사태의 책임을 같은 당 식구인 의장 탓으로 돌렸다. 기자회견을 자청한 이들은 “의장이 동료 의원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인사를 단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오는 7월 현 의장이 물러나고 후반기 의장단이 새로 구성되면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로 시장과 협의를 마쳤다고도 했다.
이 과정에 당사자인 의장은 배제됐다. 노골적인 ‘의장 패싱’이다. 통영시와 시의회는 작년 이맘때도 사무국장 승진을 놓고 충돌했다. 당시 지역구 국회의원 중재로 시장과 의장이 인사 운영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됐지만, 이번엔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이다.
통영시 사례를 두고 개정안의 태생적 한계로 인한 예견된 사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사권을 뒷받침할 ‘예산편성권’과 ‘조직구성권’은 여전히 집행부가 쥐고 있다. 이대로는 인사권 독립은커녕 상호 감시와 견제조차 불가능하다. 피해는 결국 시민에게 돌아간다. 지방자치 의미와 기능을 살리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할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
2024-01-2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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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우리는 왜 경찰과 정치권을 믿지 못하게 됐나
경찰이 지난 10일 부산에서 발생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억측과 의혹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사건 발생 이후 40여분 만에 이뤄진 물청소에까지 다다랐다. 물청소를 놓고 증거 인멸 시도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경찰은 입장문을 내고 피의자로부터 범행도구를 압수하고 범행 입증에 필요한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다며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번 경찰 수사가 ‘정치테러 은폐수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어쩌다 경찰을 믿지 못하게 됐을까. 이번 사건만 놓고 보면 경찰이 이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선거를 99일 앞두고 제1야당 대표가 대낮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곳에서 칼부림을 당했다. 야당 대표의 목숨을 노린 계획 범죄였다.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왜곡된 정치적 신념에 의한 범죄였지만, 경찰은 이 정치적 사건에서 인위적으로 정치색을 빼려 과도하게 많은 것들을 비공개 테두리로 감쌌다. 경찰 수사가 다가올 총선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살인을 시도했는데 ‘누가’ ‘왜’ 라는 질문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기본적인 질문이다. 기자들은 매일 수사본부 브리핑에 참석해 범행 동기,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당적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범행 동기는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당적은 정당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알려주지 않았다. 항의가 빗발쳤지만 경찰은 ‘피의사실 공표는 법 위반’이라는 기치 아래 “수사 중이라 알려줄 수 없다”는 기계적인 답변만 반복했다.
심지어 와이셔츠가 1차 충격을 막아 이 대표를 극적으로 살렸다는 사실 또한 사건 발생 8일 후인 종합수사결과 발표 때야 알려졌다.
그 사이 ‘범인이 사용한 흉기가 나무젓가락이다’ ‘케이크용 빵칼이다’ ‘자작극이다’ 식의 가짜뉴스가 전국을 휩쓸었다. 범인의 신상 비공개 이유마저 비공개한 한국 경찰을 비웃듯, 미국 뉴욕타임스에는 범인의 신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경찰 수사의 본질은 한 점 의혹도 남지 않게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범인이 왜, 어쩌다 왜곡된 정치 신념에 사로잡혀 범행에 이르게 됐는지, 어떤 정치 이력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드러난 것이 없다. 이렇게 해서 재발 방지책을 논의할 수 있을까. 경찰이 지나친 정치적 고려로 스스로 국민 신뢰를 잃고 권력이 바뀔 때마다 권력 눈치를 보는 기관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민주당이 경찰 수사 결과 발표 이후 “수사 축소”와 “은폐”를 주장하는 일도 혼란을 키우고 있다. 이 대표 서울대병원 전원으로 지방 의료 무시를 몸소 보여줬다는 비판을 받는 민주당은 사건 직후 ‘2등 국민’ 취급을 받은 부산 시민의 상실감을 어루만지기는커녕 ‘보수 언론 프레임’에 걸려든 우매한 감정으로 치부했다. 부적절한 서울대병원 전원과 헬기 이송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고 비난했다.
그랬던 민주당이 이번엔 재수사를 요구하며 정치 프레임에 짜맞추려 한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급기야 민주당은 지난 16일 우철문 부산경찰청장을 국회 증인으로 출석시키는 안건을 의결했다. 이로써 공정성과 중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수사 책임자를 국회로 불러들여 압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게 됐다.
2024-01-22 [18:16]